너무 겸손한 한국의 패션 리얼리티 프로… 의리와 정에 목매

외국인들이 깜짝 놀랄 만한 한국만의 독특한 풍경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경복궁? 남대문시장? 디시인사이드? 지금 TV 앞으로 가보라. 케이블 TV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도저히 리얼할 수 없는 내숭쟁이 한국인들의 가치관 전시장이다.

탈락은 나의 것

케이블 채널 온스타일에서 방영 중인 디자이너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 3(이하 프런코)>.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는 이들이 모여 매주 주어지는 미션에 맞춰 의상을 디자인하고 심사위원들의 평에 따라 한 명의 우승자와 한 명의 탈락자를 가리는 내용이다.

프로그램의 사회자인 모델 이소라의 멘트 중 가장 '쓸모 없는' 질문은 "둘 중 누가 탈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다. 개인적으로 감당하는 개별 미션이 아닌, 두 사람이 함께 팀을 이루어 진행하는 팀 미션에서 사회자는 팀 구성원 각자에게 어김 없이 위의 질문을 던진다. 원조인 미국판 <프런코>의 질문을 그대로 따온 것이지만, 포맷은 수입했어도 정서는 수입이 안 된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오빠가 낸 아이디어에 불만이 없었고요. 그러므로 둘 중 한 명이 탈락되어야 한다면 제가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 분은 이 말에 동의하나요?" "100% 동의하는 건 아니고요..."

최근 진행된 팀 미션에서 사회자의 질문을 받은 이들은 모두 자신의 탈락 또는 파트너의 우승을 요구(?)했다.

"둘 중 한 명이 우승자라면 언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이디어는 저에게서 나왔지만 그래도 00가 팀을 이끌었으니, 그냥 둘 다 우승하면 안될까요?"

사회자가 "우승에는 관심이 없나 보군요.", "안티를 두려워하시나 봐요." 등등의 말로 자극(?)했지만 참가자들은 꿋꿋이 서로를 보호했다. 당연히 미국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유럽이 발원지지만 정작 꽃을 피운 곳은 미국이다. 높은 시청률을 올리며 시즌 8까지 만들어진 미국판 <프런코>에서는 "난 천재니까요", "저 사람이 만든 옷 보셨어요? 저걸 옷이라고 만들다니" 등등의 말이 예사로 등장한다. 팀을 이루는 두 명 중 누가 탈락해야 할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100% 대답이 일치한다. "쟤요."

최근 한국에서 방영된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의 원작인 미국 <도전 슈퍼모델>은 한층 더 공격적인 분위기다. 슈퍼모델이 되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든 여자들 13명 중 평균 4명은 '비치(bitch)'다. 그들은 비하하고 싸우고 헐뜯고 모욕하는 데 이력이 났다. 당연히 시청률의 일등공신들이다.

단짝이 생기는 건 희귀한 일이고, 떨어진 사람은 수긍은커녕 심사위원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심사위원들은 위로의 말 대신 "당장 짐 싸서 나가라"고 명령한다.

이에 비해 한국의 리얼리티는 훈훈하다 못해 뜨끈뜨끈하다. 탈락자는 민망함과 죄책감으로 겸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심사위원들은 안쓰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의 사회자였던 모델 장윤주는 탈락자를 끌어 안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언니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을게요."

심사위원들끼리의 평가 시간도 이견과 논쟁을 찾아볼 수 없는 화기애애함의 도가니다.

"카디건도 좋고 스커트도 흥미롭네요." "카페에 저런 옷을 입은 직원이 있다면 매일 갈 것 같은데요?" "하하하" "호호호"

싸우다뇨, 천박스럽게시리

강렬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패션 분야에서조차 자아의 발산을 거슬려 하는 한국적 정서가 뿌리내리고 있는 건 자못 흥미로운 현상이다. 역사적으로 패션은 모든 문화 분야 중 가장 도덕적 기대치가 낮은 축에 속했다. 패션계의 전설들 중 인격으로 인류를 감동시킨 인물은 몇 명이나 될까.

한국도 마찬가지로, 한국 IT계의 도덕성은 안철수가, 영화계는 김동호, 엔터테인트먼트 계는 유재석이 각각 자기 업계의 인격을 보증하지만 패션계에서는 그런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해 작고한 앙드레 김의 이미지가 비교적 근접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 역시 코믹하거나 괴짜 이미지가 더 강했다. 그리고 대중도 딱히 패션에 도덕성을 요구하지 않는 분위기다. 그러니 그들의 기어들어가는 겸손, 가족 같은 끈끈함, 갈등과 반목을 죄악시하는 집단의식은 의외의 풍경이다.

"저게 한국이구나 싶다."

대중문화평론가 이명석 씨의 한국 리얼리티 프로그램 한 줄 관람기다.

"외국에서는 개인주의와 경쟁이 당연시되지만, 한국 리얼리티에서는 남의 시선을 의식해 적어도 겉으로는 화기애애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로 흘러가는 것이 특징이다. 사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핵심은 시청자들의 위악적 감정을 자극하는 건데 착하기만 한 출연자들은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킬지언정 자극적인 재미를 주기는 어렵다. 시청자들의 이중적인 시선도 원인이다. 외국인들이 싸우는 건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흥미로워하지만 자국민들이 싸우는 모습에는 불편함을 느끼고 공격적인 캐릭터에게는 격렬한 비난을 보낸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흥하기 어려운가? 얼마 전 울트라급 흥행으로 케이블 프로그램의 역사를 새로 쓴 <슈퍼스타 K 2>가 여기에 해답을 준다. 이 프로에 참가한 출연자들은 어김 없이 친형제처럼 서로를 챙겨주며 승자독식 구조 속에서도 '모두가 승자'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집단 내에서 자신의 이익을 주장한 몇몇 캐릭터들이 시청률에 일조한 면도 있지만, 시청자들이 프로그램에 애착을 가지게 한 가장 큰 요소는 점점 나아지는 아마추어들을 지켜 볼 때의 본질적인 쾌감, 그리고 '잘 부른 노래'라는 콘텐츠 자체의 재미다.

<프런코> 시즌 1과 <도슈코>를 제작한 온스타일 이우철 팀장은 "우리 프로그램의 핵심 재미 요소는 메이크 오버(make over)"라고 말한다.

"디자이너들이 미션을 받고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패션쇼 무대에서 짠하고 보여주는 순간, 모델들이 우여곡절 끝에 드라마틱한 화보를 완성시켜 공개하는 바로 그 순간이 이 프로그램들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재미다. 흥미로운 전개를 위해 참가자들의 갈등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런 걸 일부러 만들어낼 수는 없다. 이왕이면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캐릭터를 선호하기는 한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사생활이 주가 되는 리얼리티가 아닌, 소위 전문가들의 리얼리티이기 때문에 실력을 우선으로 선발할 수밖에 없다."

의리와 정에 목을 매고 자기애의 돌출을 허용하지 않는 한국에서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어떻게 발전해나갈까? 대중문화평론가 차우진 씨는 한국형 리얼리티의 성공은 캐릭터를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고 말한다. 흥미를 끌되 프로그램과 출연자 모두가 욕 먹지 않는 선을 연구한다는 것이다.

"미국 리얼리티가 인기를 끌면서 그게 마치 리얼리티의 본질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데, 각 나라가 추구하는 정서에 따라 재미는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한국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들을 발견하고, 또 그들이 사실 '카메라 밖에서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을 찾아내는 중인 것 같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