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명품 소비 대국으로 떠오른 중국 등 서구 패션계 러브콜 이어져

루이비통 2011 S/S 컬렉션
지난 가을 밀라노에서 프라다의 2011 S/S 컬렉션이 열렸다. 오렌지, 그린, 블루, 핑크 등 '미니멀리즘에 싫증난' 미우치아 프라다의 절박한 외침이 형형색색의 의상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올해 1월 22일 동일한 컬렉션이 베이징 센트럴아카데미 파인아트뮤지엄(CAFA)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아니 오히려 더 크게 열렸다. 리움 미술관 디자이너이자 거의 프라다 전속 건축가라 할 만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건축가 렘 쿨하스가 런웨이를 완성했고, 프라다의 모든 비주얼을 총괄하는 디자인 그룹 2x4가 CAFA를 파티 장소로 바꿔 놓았다.

프라다가 밀라노 외의 다른 도시에서 패션쇼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은 물론 홍콩과 한국, 일본에서도 취재진이 대거 몰렸고 미우치아 프라다 여사는 베이징 컬렉션만을 위한 20벌의 의상을 추가로 디자인해 선보였다.

사랑해요, 아시아

하이패션이 아시아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국내 디자이너가 조에족의 뽀뚜루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의상처럼 창작자의 소재 고갈과 대상에 대한 겉핥기식 이해가 감지돼 뒷맛이 개운치 않은 그런 종류일까? 아니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킬 빌>처럼 해당 문화에 대한 스타일리시한 오마주인가, 그도 아니면 피에르 가니에르가 방한해 만든 푸아그라에 곁들인 김치처럼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는 교훈을 다시금 실감나게 하는 그런 것인가.

"밀라노에서는 정말이지 할 만큼 다 했다. 보다 새로운 장소가 필요하다"

약 2년 전, 미우치아 프라다 여사는 경희궁에 프라다의 아트 프로젝트 '트랜스 포머' 전시회를 열었다. 장장 5개월에 걸친 대규모 프로젝트를 하필 서울에서 연 이유에 대해 묻자 그녀는 '하필'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거침 없이 대답했다.

"이건 분명 도전이자 위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끌리고 그걸 즐긴다."

지금껏 유럽 패션계가 아시아를 주시해온 계기는 주로 그 새로움에 매혹돼서다. 단순히 한물 갔다는 이유만으로 죄가 되는 패션계에서는 늘 새로운 것, 이제까지 보지 못한 것이 요구되는데 아시아는 늘 거기에 적절한 해답을 주었다.

루이 15세 시절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소개된 차이나 무드는 권태로움에 빠져 있던 귀부인들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몇 백 년 후에는 일본 패션이 유럽을 강타했다.

캐롤리나 헤레라 2011 S/S 컬렉션
그들이 보여준 아방가르드가 하도 충격적이라 유럽 패션계는 잠시 정신을 못 차렸고 한동안 서구에서 '동양의 미'는 일본의 예술세계와 거의 동의어로 쓰이게 되었ㄴ다. 그 후로 컬렉션에 아시아적 요소를 차용하는 것은 하이패션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흔한 클리셰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요즘 그들이 아시아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뭔가 다른 기운이 포착된다. 멀찍이 떨어져 영감의 원천을 관찰하는 시선이 아닌 극진한 관심, 잦은 방문, 친절한 미소. 프라다가 베이징에 온 건 분명 영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객님,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2011년 루이비통 S/S 컬렉션은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노골적인 메시지로 가득했다. 제목을 붙이자면 'I love China', 또는 'Show me the money' 정도 될까? 떠오르는 중국의 신흥 재벌들을 의식한 듯 중국 패션에 대한 오마주가 런웨이를 가득 메웠다.

치파오에 약간의 변형을 가한 드레스와 수트, 매끄러운 실크 위를 수놓은 화초 무늬, 여기에 부채를 든 벽안의 여자들은 지금 루이비통이 주시하고 있는 대륙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짚어 주었다. 마크 제이콥스는 루이비통 컬렉션에 쏟아 부은 열기가 채 식지 않았는지 자신의 컬렉션에도 허리를 끈으로 묶는 중국풍의 린넨 드레스를 살짝 선보였다.

샤넬 상하이 컬렉션
이들은 물론 샤넬에 비하면 점잖은 수준이다. 재작년 말 상하이에서 열린 샤넬 컬렉션에서 모델들은 일제히 머리에 용 비녀를 꽂고 나왔다.

귀와 목의 주렁주렁한 술 장식, 꽃 자수, 중국 전통 인형을 본 딴 파우치, 한자를 아로새긴 니트와 팔찌, 여기에 국방색 샤넬 수트까지 보고 나면 새삼 떠오르는 중국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쇼에 앞서 칼 라거펠트는 '파리-상하이, 환상'이라는 제목의 단편영화를 상영했다.

내용은 자신의 아파트 소파에서 잠든 코코 샤넬이 평소 늘 동경해왔던 상하이를 꿈 속에서나마 여행한다는 것이었다. 화면에는 "중국은 항상 예술의 산물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항상 중국인의 예술을 좋아한다"는 자막이 흘렀다.

파리에 이어 상하이에 초대형 매장을 연 디올은 단편영화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배경이 될 만한 예술적인 도시로 뉴욕, 파리에 이어 상하이를 택했다. 데이비드 린치가 감독한 <레이디 블루 상하이>에서는 아름다운 프랑스 여배우와 실질적인 주인공인 레이디 디올 백, 그리고 그 디올 백의 고객이 되어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상하이의 야경이 환상적으로 펼쳐졌다.

이 모든 쇼의 배경은 단지 돈일까? 물론이다. 시장조사기관 CLAS 아시아 퍼시픽 마켓츠는 지난 2월 2일 향후 10년 내 중국이 미국과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럭셔리 소비국으로 등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미 '구찌 세대', '베이징 파운드(영국에서 중국인들이 소비하는 돈)'와 같은 신조어들이 탄생했고 루이비통뿐 아니라 에르메스, 구찌, 펜디를 비롯한 대부분의 럭셔리 브랜드들이 중국만을 위한 리미티드 에디션을 내놓으며 열렬히 구애하는 중이다. 서구 패션이 아시아를 보는 시선은 몇 년 사이 "신선한데?"에서 "한 번 둘러 보세요"로 급반전된 것이다.

이쯤 되면 약간 쓸쓸해진다. 한국은? 한국의 아름다움을 재해석하거나 한국 소비자들의 심금을 울리려는 하이패션 디자이너는 없을까? 일본과도 다르고 중국과도 차별되는,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을 콕 집어내기 어렵다는 외부의 평이 사실은 아닐까? 얼마 전 뉴욕에서 열린 한 패션쇼는 여기에 대해 반가운 대답을 안겨준다.

케롤리나 헤레라의 2011 S/S 컬렉션은 한국의 향취로 가득했다. 갓, 쪽진 머리, 깃, 고름, 섶, 댕기, 말기 치마(말기: 여자의 가슴 부위에 닿는 치마의 윗 자락 띠) 등 디자이너는 한복의 디테일들을 놀라울 정도로 꼼꼼하게 차용했다. 위는 달라 붙고 아래로 갈수록 풍성하게 퍼지는 한복의 실루엣을 충실히 재현한 헤레라의 드레스는 이영희의 한복 드레스 말고도 한복을 이용한 다양한 배리에이션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동안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늘 중국, 일본과 함께 도매금으로 넘어갔던 한국으로서는 이토록 뚜렷하게, 그것도 외국 디자이너에 의해 재해석된 경우는 거의 드물기 때문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최대 온라인 패션 사이트 스타일 닷컴은 케롤리나 헤레라의 컬렉션을 두고 'inspired by traditional clothes of Korea'라고 정확하게 명시했다.

서구 패션의 관심은 중국에서 일본, 다시 중국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그 관심의 내용은 아시아의 생소한 아름다움과 철학에서 그들의 두둑한 지갑으로 이동하고 있지만, 철학이든 돈이든 패션의 포커스가 아시아로 맞춰지는 것은 북동 아시아에 있는 한국으로서도 좋은 일이다. 일본과 중국을 바삐 오가는 서구 패션계의 시선이 한국을 향할 때 우리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