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in the Kitchen (18) 통조림재난ㆍ전쟁 다룬 영화ㆍ소설 속 목숨 건 통조림 쟁탈전 종종 나와

코맥 매카시의 장편 <더 로드>는 평단의 찬사를 받는 순문학이 대개 그러하듯, 인간세계에 환멸을 드러내는 동시에 한 줄기 희망을 그리며 지금 여기를 되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재앙으로 더 이상 먹을 것이 없는 세상, 물조차 오염된 가상의 세계다. 살아있는 먹이는 인간뿐인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따뜻한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난다. 다른 인간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들 부자가 가진 것은 방수포와 담요, 물, 라이터, 총이 전부다. 아, 하나 더 있다. 통조림을 실은 카트. 인류에게 남은 마지막 음식물이다.

재난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통조림. 나폴레옹 전쟁의 군사식량으로 발명된 비운의 음식이다. 1800년대 초 나폴레옹은 프랑스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책을 얻기 위해 '산업 장려회'를 구성했고 전국 각지의 프랑스 인재들이 발명품을 출시했다.

일본 도호쿠 지방에 규모 9의 강진이 발생한지 엿새째인 17일 쓰나미 피해지역인 미야기현 다가조시의 한 슈퍼마켓에 식료품을 구하기 위해 몰려든 시민들이 줄을 서 있다.
그 중 아페르는 잘게 썬 양배추와 당근을 넣은 샴페인병을 제출했고 이 병조림을 더 가볍고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발된 것이 통조림이다.

탄생 배경이 나폴레옹의 이미지만큼이나 정결하다. 전쟁기간 통조림을 먹고 생을 부지한 사람의 수는 천문학적이겠지만, 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전쟁과 전쟁에서 먹었던 통조림 맛은 지워버리고 싶을 테니 비운의 음식이라 할 밖에.

전쟁에서 비롯된 음식이니, 이 음식에 얽힌 기억이 유쾌할 리 없다. 필자가 어린 시절 맛본 꽁치김치찌개의 맛은 가히 혁명적이었는데, 그 비릿하고 기름진 감칠맛의 비결이 조미료로 범벅된 통조림 국물이란 걸 알고 꽁치김치찌개를 먹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싼 값에 대량 유통된다는 것, 바로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식이라는 것, 무엇보다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발명됐다는 사실은 이 음식을 먹을거리가 아니라 식량으로 인식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러니 영화 <괴물>에서 주인공 강두가 골뱅이 통조림을 맨손으로 집어 먹는 장면을 보고 극장이 떠나가라 혼자 웃다가('이 상황은 재난입니다!'라고 내레이션하는 봉준호 감독이 연상됐다) 이상한 여자 취급 받을 수밖에.

앤디 워홀, '200개의 캠벨 수프 캔' 550×575 1962년 작
재난이나 전쟁을 다룬 영화, 소설에는 대개 통조림을 구하거나 먹는 장면이 한두 번씩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통조림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결투를 벌이거나 통조림을 구하기 위해 목숨 건 모험을 감행하는 상황도 종종 펼쳐진다. 전쟁 중의 인간은 대개 생존이란 대업 앞에 존엄과 품위와 금기를 망각하게 되니까.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인 소설가 프리모 레비는 전쟁이 만든 작가다. 화학자였던 그는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로 보내졌고, 후일 이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장편 <휴전>은 아우슈비츠에서 저자의 고향 토리노로 되돌아오는 8개월간의 여정을 그린 이야기다. 종전 후 수용소의 상황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수용소가 철수할 때 그는 현명하게도 몸을 숨겼다. 숨어있던 창고의 조그만 창문을 통해 그는 독일군들이 아우슈비츠의 경이로운 물품창고를 황급히 비우는 것을 보았고, 출발하는 북새통 속에서 독일군들이 깡통에 든 상당량의 식료품들을 길에 흘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그것들을 주워 담느라 지체할 수 없었던 독일군들은 대신 장갑차를 몰아 뭉개버리려 했다. 많은 깡통들이 부서지지 않고 그대로 진흙과 눈 속에 박혔다. 밤중에 헤넥은 자루를 들고 나가 그 환상적인 보물들을 주워 담았다.

찌그러지고 납작하게 눌렸지만 고기, 돼지비계, 생선, 과일, 비타민 따위가 그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 당연히 그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프리모 레비, <휴전> 38페이지)

절박한 음식, 절망의 맛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통조림 역사 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이 연출된 작품이다. 유대계 폴란드인이자 피아니스트인 블라디슬로브 스필만의 자전적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든 이 영화에서 주인공 스필만은 독일군의 눈을 피해 빈 집의 다락방에 숨어 지낸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먹을 것을 찾으러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는 어렵사리 찾아낸 통조림을 따다가 실수로 깡통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낭패감에 빠진 주인공의 눈에 웬 장화가 보이고 이어 자기를 내려다보는 독일군 장교의 얼굴이 보인다.

거지꼴을 한 슈필만에게 장교는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는 "피아니스트였다"고 과거형으로 말한다. 한때 피아니스트였던 이 사람은 이제 통조림을 부둥켜안고,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지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다. 이 절박한 음식은 절망의 맛을 선사한다. 스필만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틀 뒤 나는 식량을 찾아 나섰다. 은신처에서 자주 나오는 일이 없도록 이번에는 식량을 넉넉하게 비축해 놓기로 했다. 아직 건물의 구조를 잘 몰라 야간에는 제대로 길을 찾을 수 없어서 낮에 찾으러 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멀쩡한 주방 하나를 찾아냈고 이어서 식료품 저장실에서 식품 통조림 몇 개와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를 자루와 상자를 몇 개 발견했다.

나는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기 위해 일일이 끈을 풀고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 일에 너무나 열중해서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장교는 따라오라며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아무 거나 연주해 보라고 한다. 탈진한 처지이나 슈필만은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를 한다. 장교는 그의 은신처를 확인한 뒤 빵을 갖다주며 도와준다.

몇 달 전 일본의 식문화를 탐방했던 프로그램에서 각종 통조림을 소개한 적이 있다. 곤약으로 만든 라멘 통조림, 빵 통조림, 통조림 안주만 파는 통조림 술집까지. 자판기와 더불어 일본의 인스턴트 식문화를 대표했던 통조림은 사실 재난이 빈번한 일본 사회에서 전략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음식이었을 게다.

'산 것을 죽여서 가공한 후 죽지 않게 밀봉 처리하는 것, 그러니까 죽은 것을 상하지 않게 가공 처리하여 동일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편혜영 단편 '통조림 공장')이 밀봉 기술의 핵심인 바, 통조림은 재난 이전의 상태를 동일하게 유지하는 거의 유일한 음식이니까.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복구 작업을 하는 원전 사수대에게 지급된 식량이 비스킷과 통조림이라고 하던가. 지진 이후 슈퍼마켓 앞에 길게 늘어서서 차례로 통조림을 사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며 어린 시절 먹었던 그 비릿하고 기름진 꽁치찌개를 떠올렸다.

기름과 조미료 범벅의 인스턴트식품이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구나,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먹고자 하는 욕망은 살고자 하는 의욕의 또 다른 표현이다. 고로 슈퍼마켓 앞의 길게 늘어선 그 줄은 신성한 것이다. 생의 의지 앞에서 조금은 더 경건해져야겠다.

'언젠가 이 도시를 다녀온 사람에게 어묵 통조림을 선물 받은 적이 있다. 선물을 준 이는 재미로 사 왔을 게 분명하지만, 통조림은 사실 재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 선물 받은 어묵 통조림은 보존 기간이 8년이나 되었다. 재미 삼아 먹어보니 국물은 짰고 어묵은 테니스 공처럼 퉁퉁 불어 비상시가 아니고는 먹을 수 없는 맛이었다.' (편혜영, 단편 '저녁의 구애')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