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의 소통법 터득, 타인의 말 경청은 말하기의 기본

영화 '킹스 스피치'
영화 <킹스 스피치>는 미디어 정치의 시대, 말더듬이 왕에 대한 영화다. 왕이 국민을 이끌기 위해 전장에 나가는 대신 마이크 앞에서 연설을 해야 하는 시대, 왕은 '스피치' 훈련을 받으며 우여곡절 끝에 왕의 화술을 익혀간다.

그리고 전쟁을 맞은 절체절명의 시점에서 대국민 연설을 하며 신뢰받는 왕으로 거듭난다. 영화 같은 얘기는 알려진 것처럼 사실이고, 이 왕은 영국의 조지 6세, 그러니까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다.

이 영화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간명한 사실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미디어 정치의 시대에 태어난 왕은 당연히 말을 잘해야 하고, 말더듬이 왕은 '진심'의 연설로 국민의 신뢰를 얻는다.

인터넷, 스마트폰 기타 등등의 매체가 범람하는 시대다. 이제 왕이 아니라도 '스피치'를 해야 하는 시대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한 편에서 청산유수로 말 쏟아내는 사람은 경박하고 간사하다는 고정관념이 여전하다.

이어령 선생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달변'이라고 하지 않던가. ("달변이라는 말은 '내용은 없어도 청산유수'라는 말인데, 참 모욕적이에요. 강연 후에 누가 '청산유수시네요' 하면 할 말이 없어요." 2006년 10월 한국일보 인터뷰)

오바마 미국대통령, 메르켈 독일 총리, 룰라 브라질 전 대통령,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사 의장
요컨대 우리는, 말을 잘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잘하면 안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말하기가 좋은 말하기 일까? 우리는 어떤 말로 타인과 소통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말한다. 말하기는 언변의 기술이 아니라고.

우리가 아니라 나라고

타인과 소통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낮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메라비언의 법칙을 살펴보자. 한 사람이 상대방으로부터 받는 이미지는 시각이 55%, 청각이 38%, 언어가 7%에 이른다.

말하고 듣기, 이른바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영역을 다 합해도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영역보다 낮은 비율을 차지한다. 물론 이건 사람의 이미지에 관한 연구결과이므로 누군가와 말하기를 할 때의 언어와 비언어, 듣기와 말하기의 역학 관계는 달라질 수 있다.

본격적으로 말하기에 집중해보자. 방송인 유정아 씨는 저서 <서울대 말하기 강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말에 대해 배우는 것은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꺼내는 작업이다.' (9페이지)

그렇다면 우리나라 중년 남성들은 자신을 밖으로 꺼낼 때 어떤 특징을 보일까?

"나보다는 우리에 대한 개념이 지배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조직과 가정이 우선시 되죠. 우리라는 감정을 내세워서 연대감, 일체감으로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반영된 겁니다. 이직이나 퇴직 시점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려줘야 하는데도 나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미지컨설팅업체 누에이미지 김은진 대표의 말이다. 김 대표는 중년 남성의 특징으로 "관심사가 단순화되면서 호기심이 현격히 줄어든다"고 말한다.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에 공감대를 느끼지만 여타 부분은 무관심해집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대화가 잘 이뤄지는 것 같지만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는 관심이 줄어드니 대화의 빈곤함은 증가하죠. 자녀와의 대화에서 장애가 생기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이 정도면 조지 6세처럼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법이다. 김 대표는 "다만 대화를 듣고, 상대방의 말 가로채지 않고, 핵심사항을 전달하고, 이해력이 풍부해지는 스킬들은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말하기 교육의 1단계는 소통 과정에서 간과하기 쉬운 자신과의 소통 방법을 터득하고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를 익히는 것이다. 남관희 한국리더십센터 전문 교수는 "여자는 관계지향적 대화에 강하고, 남자는 사실지향적 대화가 강하다"고 말한다. 흔히 남성이 여성보다 자기중심적이라고 오해받는 이유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아내가 "여보, 운전 좀 천천히 하면 안돼요?"라고 물을 때 대부분의 남편은 "80km/h 가 빠르나?"고 되묻는다. 여성은 감성(불안)을 말하는데, 남성은 팩트로 받아치는 경우다.

이럴 때, 대화는 단절된다. 물론 상대방의 감성을 중시하는 관계지향적 대화와 사실관계를 중시하는 사실지향적 대화 중 어떤 것이 더 좋다거나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대화의 상황과 상대방에 따라 적절한 대화방식을 찾으면 된다. 남관희 교수는 "남성들은 흔히 사실지향적 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배려가 낮은 대화에 익숙하다. 중요한 것은 관계가 형성돼있지 않으면 사실지향적 대화도 거스르게 들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자기를 내 맘처럼 알아주는' 대화를 하려는 성향이 강하다"고 덧붙였다.

도대체 어떻게 경청하란 말인가?

요즘 '말 잘하기'를 강연하는 전문가들은 '잘 듣기'부터 가르친다. 상대방의 호불호나 관심의 일치, 감성을 파악하는 것은 성공적인 말하기의 밑거름이 되는 바, 경청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전 기업에서 경영학 석사 출신의 학식이 풍부한 이들을 우대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말 잘하는 사람을 뽑았고, 최근에는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을 뽑는다. 경청의 중요성을 시장이 간파하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단순히 잘 듣는 것을 넘어 잘 듣고 있다는 반응 즉 피드백을 보여야 한다.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필터링의 관성에서 탈피하여, 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 자신의 삶의 경험과 해석을 가미해 해석하고, 의문이 생기면 질문을 통해 확인하고 함께 대화를 확장할 수 있어야 제대로 말하고 들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비판적 듣기를 넘어선 구성적 듣기, 건설적 듣기라 하겠다.' (유정아 <서울대 말하기 강의> 49페이지)

단순히 피드백만이 아니다. 말 중간의 침묵은 유창한 말보다 청중을 잘 환기시킬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의 화술은 논리적이고 겸손하다. 2008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펼친 그의 화법은 우리나라에 '기적의 스피치'로 소개될 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전설의 스피치로 기록된 연설은 지난 1월 12일 애리조나 총기난사 희생자 추모 연설이다. 근래 최고 명연설로 꼽히지만 실제 연설의 포인트는 침묵이었다. 일명 '51초의 침묵' 연설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당시 사건으로 숨진 9세 소녀 크리스티나를 추모하며 "우리는 우리 아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 뒤 감정을 추스르며 51초 동안 연설을 중단했다. 이때 예상치 못한 침묵이 감동을 주며 정파를 초월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연설 당시 녹화 영상을 자세히 보면 그는 잠시 먼 곳을 응시했다 다시 관중을 바라보고 한숨을 쉰다. 그리고 다시 원고를 보다가 반대편 청중을 보고 입술을 깨문다. 청중을 상대로 말할 때와 똑같은 표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는 침묵하면서 메시지를 전하는 능력을 보여준 셈이다.

소통 능력은 상호 작용의 상황에 알맞게 메시지를 조절하는 언어적, 인지적 능력을 일컫는다. 말하기 능력은 타고났다는 선입견을 뒤엎고 최근에는 말하기 훈련을 통해 의사소통 능력이 향상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들이 부지기수로 나와 있다.

몇 년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화술과 스피치학원은 그런 가능성에 대한 증거일 게다. 그러니 노력, 해보자. 어눌하지만 진심이 담긴 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말더듬이 왕처럼.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