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디자인, 저렴한 가격으로 사랑받는 원조 '케즈' 론칭

신문광고(1941년)
오랜 세월 동안 전 계층의 사랑을 받으며 문화 아이콘으로 등극한 패션 중에는 일명 '빡침'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캘리포니아 광산에서 금을 캐다가 바지가 자꾸 찢어져 '빡친' 광부들을 위해 리바이 씨가 만든 바지는 지구인의 공통 유니폼 청바지가 되었다. 군함을 검열하다가 민소매 밖으로 삐져 나온 선원들의 겨드랑이 털에 기함한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서는 티셔츠가 탄생했다.

전 인류의 오프타임 동선을 책임 지는 스니커즈는 어떨까? 캔버스 천에 밑창을 고무로 댄 단화의 대표격인 컨버스 역시 일화를 가지고 있다.

1908년 당시 30대 후반이던 컨버스 씨가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빡쳐서' 만든 것이 스니커즈의 시작이라는 것. 그러나 이는 확인되지 않은 야사다.

'편안한 고무 신발'이 아닌 스니커즈라는 단어에만 천착한다면 그 역사는 라는 브랜드에서 시작됐다. 1917년 스트라이드 라이트 사의 전신인 US러버에서 캔버스 천에 녹인 고무를 입힌 신발을 만들어 라는 이름으로 출시했다.

케즈
신경을 긁는 또각또각 소리가 나지 않는 데다가 가볍기까지 한 이 실용적인 신발은 점점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의 광고 기획사가 붙인 '살금살금 걷는 사람'이라는 뜻의 스니커즈(sneakers)라는 애칭이 소비자들에게 받아 들여지면서 스니커즈의 역사가 태동했다.

살금살금 걷는 사람, 스니커즈

지난 4월 28일 청담동 갤러리 페이스에서는 의 국내 론칭 쇼케이스가 열렸다. 스니커즈의 원조인 가 들어온 것은 한국 스니커즈 역사에도 의미가 있다.

스니커즈의 핵심 정신은 편안함, 그 저변에 깔린 안티 패션(anti-fashion)이다. 온 거리의 먼지를 쓸고 다닌 90년대 힙합 문화, 그리고 2000년대 초반의 '츄리닝' 열풍 등 한국의 패션이 어깨에 힘을 뺄 때마다 그 곁에는 어김 없이 스니커즈가 함께 했다.

그 자체로 젊음과 하위 문화의 혈기를 뿜어내는 스니커즈의 강력한 상징성은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소피아 코폴로가 감독한 이 영화에서 화려하고 빡빡한 궁정 생활에서 소외된 14살의 앙투아네트는 실크 드레스와 구두, 화려한 케이크 속에서 사치로 소일한다.

케즈 쇼케이스전시
그런데 관객들이 도중에 눈을 비비게 만드는 장면이 있으니 수많은 구두 더미 사이로 얼핏 스쳐 지나가는 연 보라색 스니커즈다.

18세기 프랑스 궁정에 20세기 미국 공산품이 웬 말인가. 감독은 비단 구두 사이에 스니커즈를 놓아두는 것만으로 "이 영화는 혁명기에 격동의 세월을 보낸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가 아니라 10대 소녀 마리의 이야기"임을 간단하게 주지시킨다. 결국 '중세 시대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틴에이저 영화'라는 특이한 정체성이 단 한 켤레의 스니커즈로 완성된다.

오프 타임의 전유물이던 스니커즈는 최근 온 타임으로의 진입이 한창이다. '비즈니스 캐주얼 선포'라는 국내 상황도 상황이거니와, 법칙을 깬 믹스 & 매치 스타일링이 대중으로 확산된 것도 한 몫하고 있다.

수트에 성공적으로 스니커즈를 매치한 패셔니스타들 덕에 남자들은 딱딱한 구두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게 됐고, 여자들은 출근할 때 스니커즈를 신었다가 사무실에서 하이힐로 갈아 신는 뉴욕의 오피스 걸들과 "드레시한 롱 스커트에 스니커즈를 신어 보라"는 디자이너들의 속삭임에 잔뜩 고무된 상태다.

여기에 세계적인 흐름인 패션의 합리주의가 더해지면서 스니커즈의 정신성이 새삼 재조명되고 있다. 비싼 것, 불편한 것, 부풀려진 것 등 거창한 불합리를 거부하는 작금의 트렌드는 100년이 넘도록 특별한 로고나 장식 없이 단순한 디자인과 저렴한 가격을 쭉 고수해온 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파토가스
이유 없이 비싼 백화점은 외면하고 자라와 유니클로 매장에서 자기만의 스타일 찾기에 나선 한국의 패션 피플들. 그들은 킬 힐과 신사화의 자리를 스니커즈에 내어주는 것을 전혀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스니커즈 브랜드가 꼭 오랜 전통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20세기를 관통하며 대중과 함께 뒹군 시간은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스니커즈 중 유구한 역사를 가진 브랜드 4개.

반스와 함께 국내 스니커즈 시장을 이끄는 쌍두마차, 컨버스. 해외 패션위크 기간 동안 길거리에서 찍힌 모델들의 느슨한 차림에는 어김 없이 컨버스가 동행하고 있다.

1908년 미국 매사추세츠 몰든에서 마르키스 컨버스에 의해 만들어졌다. 세계 최초로 기능성 농구화인 '컨버스 올스타'를 출시했으며 1923년에는 농구 선수 척 테일러의 이름을 딴 '척 테일러 올스타 컨버스'라는 세기의 히트 상품을 내놓는다. 50년대 이후에는 제임스 딘, 엘비스 등이 신으면서 '운동할 때 신는 신발' 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를 굳혔다. 전 세계 180여 개 국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현재 10억 켤레 판매량을 자랑하는 글로벌 브랜드다.

수페르가
구입처: 거의 모든 백화점과 컨버스 로드숍

원조 스니커즈, Keds

스니커즈라는 단어를 탄생시킨 원조 브랜드. 1916년 미국에서 운동화의 밑창에 고무를 덧댄 운동화가 고안되었는데 이 신발의 정식 명칭은 , 애칭은 스니커즈였다. 역사는 100년에 가깝다.

심플한 외관에 알록달록한 컬러라는 디자인 정체성을 흔들림 없이 지키고 있는 는 섹스 심볼 마릴린 먼로의 스니커즈로도 유명하다. 화려한 이미지의 그녀지만 하이힐에서 내려올 때는 클래식하고 단정한 를 즐겨 신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 대통령들도 자주 신어 '대통령의 운동화'로 불리기도 했다. 의류나 가방 등으로 가지치기를 하는 타 브랜드와 달리 스니커즈 하나만 생산하는 전문 브랜드.

10억 켤레의 위엄, 컨버스 Converse
구입처: 에이랜드, 현대백화점 미아점, 신촌 유플렉스

유럽의 컨버스, SUPERGA

두꺼운 생고무 밑창과 편안한 착화감으로 유명한 는 100년 역사의 이탈리아 대표 스니커즈 브랜드다. 1911년 론칭한 이래로 'People's shoes of Italy'라는 브랜드 슬로건에 맞게 이탈리아 및 유럽 전역에서 사랑받았다.

캔버스 소재의 갑피와 천연 고무 아웃솔, 수작업으로 친환경을 강조하는 이 브랜드는 스니커즈뿐 아니라 드레스 슈즈부터 런닝화까지 다양한 라인을 보유하고 있다. 최근 가장 뜨는 패셔니스타인 알렉사 청이 광고 모델. 제일 인기 있는 벌커나이즈를 비롯해 5개 라인이 국내에 들어 왔다.

구입처: 인터스포츠, 풋마트, 에스마켓, 풋웨어익스프레스, 무라사키스포츠 매장

원조 스니커즈, 케즈 Keds

1950년 프랑스에서 탄생한 시크한 스니커즈 브랜드. 톱니 모양의 고무 밑창이 특징인 파토갸스의 철학은 심플함과 윤리다. 전 제품에 오가닉 면을 사용하며 가죽을 무두질할 때 크롬 대신 떡갈나무와 아카시아 나무 등 식물성 재료를 쓰는 것은 물론, 상자와 쇼핑백까지 재활용 가능한 재질로 생산한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필리 모간의 "심플한 것을 존중하고 모든 허영심을 버린다"는 이념을 반영해 침착하고 고급스러운 색감의 모던한 디자인을 내놓는다. 목이 긴 하이톱 라인이 특히 인상적. 매장에 가면 지난해 장폴 고티에와 콜라보레이션한 제품들도 볼 수 있다.

구입처: 압구정 갤러리아 웨스트


유럽의 컨버스, 수페르가 SUPERGA
에코 오가닉 스니커즈, 파토갸스 PATAUGAS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