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오롱스포츠 '라이프재킷'
패션의 시작은 무엇일까? 유명 디자이너와 럭셔리 패션 브랜드, 혹은 계절을 앞서가는 세계의 패션위크?

답은 소재다. 당연하다. 소재가 없으면 아무리 기발한 디자인과 기획도 실현될 수 없다. 국제적 면 수급 불안이 의류 업체들을 긴장시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런 추세라면 면 티셔츠와 양말은 곧 만만하지 않은 아이템이 될 것이다.

최근 미국 CBS 방송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내 면 수출·제조업체의 89%는 면 대신 레이온, 라이크라 등의 소재 사용을 늘릴 예정이며, 25%는 면이 덜 들어가는 디자인을 연구하고 있다.

유행도 소재 확보 이후의 일이다. 매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프리미에르 비종', '첫 선을 보인다'라는 뜻의 섬유 전시회가 열리는데, 세계 각국의 패션 디자이너는 여기에서 다음 시즌 작업 소재를 고른다. 디자인은 확보한 소재에 맞춰 구체화된다. 그로부터 몇 달 후 패션위크가 열리고 비로소 유행이 퍼져나간다.

새로운 소재를 읽으면 미래의 패션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자연과 기술의 협업으로 태어나는 소재에는 환경적 영향과 사회적 욕구가 두루 반영되어 있다.

해지스골프 '매직시리즈 액세서리'
기후변화는 아가씨도 내의를 찾게 한다

이상 고온과 저온, 계절 주기의 흐트러짐, 느닷없이 찾아드는 자연 재해…. 몇 년 사이의 급격한 기후 변화는 패션 산업을 혼란에 빠뜨렸다. 계절에 따라 제품을 기획하고 유행을 예측하는 것이 패션계의 관행이었는데, 이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제품 순환이 전례 없이 압축된 패스트 패션은 이런 불안정한 상황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었는지 모른다.

패션 소재 역시 기후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천연섬유 수급이 기후 변화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생태계 파괴는 매 계절 천연섬유의 생산량과 질을 장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안정적인 대체재를 찾거나, 환경을 안정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변덕스럽고 혹독해진 환경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기능성에 대한 요구는 소재의 기술적 진화로 이어졌다. 스스로 열을 내거나 차가워지는 소재, 자외선과 오염물질을 막는 소재, 날씨를 점검하고 몸 상태를 확인하는 소재 등이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기후 변화가 계속된다면 디자인이나 유행도 이런 소재의 특성으로부터 생겨날지 모른다.

지난 겨울 열풍을 일으킨 발열내의는 소재가 곧 디자인이 된 사례였다. 소재를 앞세운 마케팅으로 유명한 글로벌 SPA 브랜드 유니클로의 히트텍은 전 세계적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혹한은 아가씨도 내의를 찾게 만들었고, 소재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웠다.

아디다스골프 '포모션셔츠'
아웃도어웨어의 생활화는 예측할 수 없는 계절 탓일까

지난 4월부터 코오롱패션산업연구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2011년 중소기업 핵심직무능력향상 지원사업의 주제는 '기후 변화 대응 패션상품 기획을 위한 신소재 개발'이다.

코오롱패션산업연구원의 변정순 과장은 "봄, 가을은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은 길어지는 등 계절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패션 산업의 경쟁력은 기술력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소재 개발과 적용이 패션 산업의 화두라는 뜻이다.

최근 아웃도어웨어와 스포츠웨어 시장이 핫이슈인 것은 단지 등산과 캠핑, 골프를 즐기는 인구가 늘어나서만은 아니다. 덥거나 춥거나, 비바람에 노출되는 등 극한 상황을 고려하는 이들 의류가 신체 보호 기능의 테스트 베드이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기능은 기후 변화가 심해질수록 일상복에도 적용될 수 있다.

언젠간 외부 온도와 상관없이 내부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우주복 소재가 등산용 점퍼를 거쳐 출퇴근할 때 입는 옷, 집 앞 슈퍼에 갈 때 입는 옷으로까지 퍼져 나갈 수도 있다. 실제로 아웃도어웨어와 스포츠웨어에만 쓰이던 기능성 소재가 최근에는 남성복과 교복으로 세력을 넓히는 추세다.

한국의 중장년층 남성들은 이미 아웃도어웨어를 생활화함으로써 얼리어답터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건 그들이 패션에 무심해서가 아니라, 앞선 패션 감각을 지녔기 때문인지 모른다. 갑작스런 비와 모진 황사, 심한 일교차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등산용 점퍼는 디자인이 소재와 기능을 따르는 패션의 미래이므로.

기능성 소재의 치열한 전쟁

계절이 바뀔 때마다 벌어지는 아웃도어웨어의 기능성 전쟁의 중심에는 '보온'과 '냉감', '수분 제어'가 있다. 겨울에는 열을 내거나 축적하는 소재가, 여름에는 체온을 낮추고 땀을 빠르게 증발시키는 소재가 선봉장을 맡는다.

유니클로의 히트텍, 미즈노의 브레스 서모, 동일방직의 웜프레시 등의 발열 소재는 물을 흡수하면 온도가 올라간다. 수증기의 운동에너지를 열에너지로 바꾸는 원리. 일반 섬유에 비해 약 2도 정도 높은 체온을 유지시켜주며, 주로 내의에 쓰이지만 그 활용도는 점점 넓어지고 있다.

유니클로에서는 히트텍 스키니 팬츠, 머플러, 장갑, 레그 워머 등을 출시했고, 웜프레시는 LG패션 TNGT의 남성용 정장에 활용되기도 했다.

아디다스골프 '클라이마쿨 라이드'
아우터에도 다양한 방식의 발열·보온 소재가 시도되고 있다. 컬럼비아스포츠웨어코리아의 히트앨리트 재킷에는 옴니히트 기술이 적용됐다. 안감의 은색 점 무늬가 몸의 열을 반사하고 축적해 옷 안쪽을 따뜻하게 유지시킨다. 데상트의 다운 재킷에는 히트나비라는 기술이 쓰였다.

태양에너지를 흡수해 열에너지로 바꾸는 특수 탄소무기질을 적용한 소재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외선까지 보온에 동원하는 똑똑한 기술. 수분을 열로 변환하는 기능도 갖추고 있어 일석이조다.

코오롱스포츠의 라이프텍 재킷은 전기가 통하는 이른바 '스마트 섬유'인 히텍스를 발열용으로 장착한 사례. 옷에 열을 내기 위한 배터리가 내장되어 있다. 온도는 35~50도 내에서 조절할 수 있고, 최대 7시간 동안 작동된다.

체온을 낮추는 소재들은 태양열을 차단하고, 열을 흡수하거나 빠르게 전도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효성의 아스킨은 피부와 닿는 면적을 넓힘으로써 열을 분산시키는 섬유. 스위스 쉘러에서 나오는 콜드블랙은 적외선을 최대한 반사해 태양열로 인한 체온 상승을 막는다. 어두운 색에도 적용이 가능해 여름에도 올블랙룩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해준다.

벤텍스의 아이스필은 태양열 차단과 땀을 냉매로 전환하는 복합 기술로 탄생한 섬유다. 적외선을 반사·산란함으로써 체온을 최대 2도 떨어뜨린다. 섬유에 함유된 자일리톨 성분은 땀을 빠르게 증발시켜 피부로부터 열을 빼앗는다. 물파스를 바르거나, 땅에 물을 뿌리면 주변이 시원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코오롱패션머티리얼 '재생섬유 에코프렌-R 전시'
수분제어 기술은 땀을 빠르게 확산시키거나 밖으로 배출하고, 비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 쾌적한 상태를 유지시킨다. 고어텍스, 심파텍스 등의 소재는 땀으로 인한 수증기는 통과시키지만 바깥의 큰 물방울은 막아준다.

1초 만에 땀이 마르는 섬유인 벤텍스의 드라이존은 여름철 격렬하게 움직인 후에도 상쾌한 기분을 약속한다. 세탁 후에도 바로 입을 수 있다. 피부에 닿는 섬유면이 3중 모세관처럼 작용해 땀을 신속하게 바깥으로 증발시킨다. 동시에 방수 기능을 갖추고 있어 비로부터 몸을 보호한다.

환경을 감지하고 신체에 반응하는 신소재

여기에 자외선 차단과 항균 등의 기능이 추가되어 전방위적 성능을 자랑하는 소재들도 속속 선보이고 있다. 이들 소재는 기후 변화로 인해 떨어지기 쉬운 면역력을 보완해 준다.

수분을 제어할 뿐 아니라 자외선을 차단하고, 은 성분을 함유해 항균·방취에도 효과가 있는 코오롱패션머티리얼의 ATB-UV+ 소재는 스포츠웨어를 넘어 최근 교복에까지 쓰이고 있다. 수 차례의 세탁 후에도 성능이 유지되는 반영구적 수명 덕분에 인기를 누리고 있다.

LG패션 TNGT '친환경 젠트라 수트'
올 봄과 여름, 신소재의 전시장이자 전쟁터로 떠오른 곳은 바로 골프장. 해지스골프는 냉감 효과는 불론 자외선과 황사 먼지 등 유해물질로부터 신체를 보호해주는 기능성 의류 라인 매직시리즈를 내놓았다. 입는 순간 시원하게 느껴지는 매직아이스 피케셔츠를 비롯해 황사 먼지로부터 코와 목, 팔을 감출 수 있는 액세서리들, 초경량으로 휴대하기 편리한 비옷 등이 포함됐다.

아디다스골프에서 출시된 포모션셔츠는 신체에 산소를 공급하는 소재인 쿨맥스에너지로 만들어졌다. 운동을 하면 근육 내 산소가 감소해 피로해지는데 이 셔츠를 입으면 근육 회복 속도가 빨라진다. 함께 사용된 클라이마쿨 소재는 통풍이 잘되고 땀을 빨리 마르게 해 쾌적한 몸 상태를 유지시킨다.

클라이마쿨 소재는 아디다스의 새로운 러닝화 클라이마쿨라이드에서도 특기를 발휘한다. 갑피와 밑창, 안창이 모두 최소한의 클라이마쿨로 만들어진 이 러닝화는 어떤 방향으로도 공기가 통한다. 습도와 온도를 낮춰 아무리 더운 날에도 발을 건강하게 지켜주는 구조다.

이밖에 앞으로의 진화가 가장 기대되는 분야는 IT기술을 접목시킨 스마트 소재다. 기존 섬유에 디지털 장치를 더하는 수준을 넘어 섬유 자체가 하나의 디지털 장치로 기능하도록 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섬유 자체가 일종의 센서가 되어 스스로 환경을 감지하고 대응하는 인텔리전트 소재도 곧 등장한다. 환경 변화에 따라 색과 온도, 습도를 바꾸고, 신체 상태에 반응해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준다는 꿈같은 소재다.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친환경 소재

친환경 소재들은 기후변화의 결과가 아닌 원인에 대응한다는 의미에서 각광받고 있다.

면과 마 등 전통적인 섬유뿐 아니라, 콩과 너도밤나무 등에서 추출한 섬유도 자리를 잡아가는 추세다. 동일방직에서는 대나무를 원료로 한 밤부실을 생산하고 있으며, 쌍영방직의 한지사도 유명하다. 일본에서는 바나나로 만든 섬유도 상용화됐다.

최근 주목받는 섬유 중 하나는 옥수수 섬유다. 휴비스의 인지오가 대표적인 사례. 생산 과정에 들어가는 에너지량은 폴리에스터나 나일론을 만드는 양의 30% 수준이다. 옥수수 4개에서 티셔츠 한 장 분량의 원사를 뽑아낼 수 있으며, 땅에 묻으면 1년 내에 썩어 없어진다.

먼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LG패션 TNGT에서 옥수수 섬유로 만든 친환경 젠트라수트를 출시했다. 항균 기능을 더해 황사 먼지로부터 신체를 보호해주며 탈색, 변색도 방지된다.

미역, 다시마 등의 해조류를 포함한 섬유인 동일방직의 시셀도 독특하다. 해조류의 천연 미네랄, 아미노산, 비타민 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류로 만들어 착용했을 때 혈액 순환과 신진 대사 촉진, 보습과 노화 방지, 항 박테리아 등의 효과를 볼 수 있다. 덕분에 캐나다에서는 '비타민 의류'로 알려졌다.

"친환경은 자원이 유한한 환경에서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죠." 동일방직 김찬호 신소재상품팀장의 말처럼, 소재 산업에서의 '친환경'에 대한 이해는 섬유 생산에서부터 유통, 소비에 이르는 전 과정의 환경적 영향을 고려하는 데까지 깊어져 있다. 유기농법으로 길러진 천연섬유, 수명을 다한 후 생분해되는 섬유, 페트병과 폐의류를 재생한 섬유에 대한 관심이 높다.

코오롱패션머티리얼은 버려진 페트병을 가공한 재생 폴리에스터 에코프렌-R을 생산하고 있다. 품질은 일반 폴리에스터와 같지만, 원료인 원유와 생산 과정에 필요한 에너지를 획기적으로 줄인 소재다. 이 소재는 현재 코오롱스포츠의 제품에 적용되고 있다.

휴비스 역시 페트병에서 뽑아낸 섬유 에코에버를 상용화했다. 페트병 다섯 개가 티셔츠 하나 분량인데, 작년 한 해 동안 500만 개의 페트병을 재활용했다. 올해에는 그보다 3배 많은 1500만 개의 페트병이 의류로 새로 태어날 예정. 에코에버는 나이키에 공급하는 공식 재생 원사로 등록되기도 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패션의 미래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소재들은 앞으로 패션 문화 속에서 풀어나가야 할 질문을 던지고 있다. 김찬호 팀장은 "친환경이라는 개념을 소재에 적용하다 보니 오히려 진짜 친환경이 무엇인지 묻게 됐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천연섬유라고 무조건 친환경적인가, 페이크퍼, 인조 오리털을 만드는 화학섬유도 친환경적인가, 보온·냉감 기능이 있어 냉난방 에너지를 덜 쓰게 만드는 소재도 유기농 면만큼 친환경적인 것은 아닐까 등등의 딜레마가 생긴다.

해답은 패션이 유통·소비되는 생활 속에서 찾아가야 할 것이다. 기후변화로부터 내 한 몸 지키기에 급급하기보다 환경을 건강하게 지속시키려는 패션 소비자들도 질문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해외의 패션 브랜드 매장에는 이미 재생섬유를 만들기 위한 의류 수거함이 등장했다고 한다. 이곳에 모인 의류들은 새로운 의류로 다시 태어날 기회를 갖게 된다. 계절이 바뀌고, 되돌아오듯, 패션은 돌고 돈다. 기후변화가 더 심해지지 않는 한은 말이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