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 in the Kitchen] (23) 수박하모니카 불듯 먹어야 제맛… 저마다 추억의 책장을 넘기고

'용둣골 수박,/ 수박을 드리고 싶어요./ 수박살에/ 소금을 조금 발라 드렸으면 해요./ 그러나 그 뜨거웠던 여름은 가고,/ 할머니,/ 어젯밤에는 달이/ 앞이마에 서늘하고 훤한/ 가르마를 내고 있었어요/ 오십 년 전 그 날처럼.' (김춘수 '차례' 중에서)

이런 날이면 이 시를 처음 읽었던 중학교 문학시간이 떠오른다. 장마는 지고, 습도는 높고, 불쾌지수는 하늘을 찌르는데 마음먹고 고른 수박까지 맹탕인 날이다. 김춘수의 저 시처럼, 수박에 소금이라도 쳐야 할까? 이 산 같은 수박을 언제 다 먹어치울까.

선홍의 바다가 펼쳐지고

수박에 소금을 아주 살짝 바르면 더 달아진다고 하지만, 여태껏 수박을 먹으며 저 방법을 실행해 본 적은 없다. 필자 같은 사람이 꽤 있나보다. 포털사이트의 한 '파워블로거'는 실험정신을 발휘해 소금을 발라먹어봤다는 포스팅을 올렸는데, 거기에 꽤 많은 사람들이 댓글을 달았다.

세심한 탐구정신으로 그냥 수박, 설탕 뿌린 수박, 소금 뿌린 수박까지 다양한 실험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금 뿌린 수박 맛은 이상했다고. 댓글에는 '너무 많이 뿌린 것 같다'는 의견이 꽤 있었다.

작가 김훈은 수박 특유의 모양과 향을 이렇게 말한다.

'잘 익은 수박은 터질 듯이 팽팽해서, 식칼을 반쯤만 밀어넣어도 나머지는 저절로 열린다. 수박은 천지개벽하듯이 갈라진다. 수박이 두 쪽으로 벌어지는 순간, '앗!' 소리를 지를 여유도 없이 초록은 빨강으로 바뀐다.

한 번의 칼질로 이처럼 선명하게도 세계를 전환시키는 사물은 이 세상에 오직 수박뿐이다. 초록의 껍질 속에서, 영롱한 씨앗들이 새까맣게 박힌 선홍색의 바다가 펼쳐지고, 이 세상에 처음 퍼져 나가는 비린 향기가 마루에 가득 찬다.' (에세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수박과 자두' 중에서)

사람마다 수박 먹는 방법도 제각각인데, 여름철 수박 먹는 행동을 보면 사람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필자 가족 중 성격이 제일 급한 아버지는 수박씨까지 씹어 드신다. 그리고 젓가락으로 수박씨를 발라내며 여름마다 "씨없는 수박 사달라"는 막내에게 "사람이 인내심을 기르려면 씨가 있는 수박을 먹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설파하신다.

살림살이에 이골이 난 어머니가 수박을 자를 때면 식구들은 숟가락 들고 빙둘러앉아 수박을 통째로 파먹어야 한다. 어머니는 "이렇게 먹는 게 제일 맛있기 때문"이란 논리를 펼치지만, 그 논리 끝에 항상 이런 말을 덧붙인다. "수박즙도 안 흐르고 얼마나 좋으냐."

어렸을 때 '얌통머리 없다'는 타박을 많이 들었던 언니는 아직도 수박의 달콤한 끝 부분만 잘라 먹고 냉장고에 넣어두는 짓을 자주 한다.

필자가 혼자 수박을 먹을 때면 과육만 도려내 포크로 찍어 먹는다. 접시에 담아 먹는 이 깔끔한 면모는 수박을 먹을 때만 발휘되는데, 성격이 새침해서가 아니라 필자가 음식을 잘 흘리고 먹기 때문이다. 김훈은 '수박의 과육을 주사위처럼 오려내서 포크로 콕콕 찍어먹을 것이 아니'(같은 글)라고 하지만 그건 각자의 취향이니까.

'수박을 껍데기째로 초승달 모양으로 잘라서 하모니카 불듯이 두 손으로 쥐고 좌우로 밀어가면서, 입과 코와 가능하면 턱까지 모두 빨간 과육 속에 깊숙이 파묻고 손가락 사이로 과즙을 줄줄 흘려가면서 입을 크게 벌려서 걸신 들린 듯이 아귀아귀 먹어야 한다.' (같은 글)

수박의 추억, 여름의 추억

여름이면 떠오르는 과일이 수박이니, 수박에 얽힌 추억은 곧 여름의 추억이라 해도 무방할게다.

소설가 이순원의 나이는 50대이지만, 그는 물리적 나이보다 훨씬 이전세대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지금까지도 마을 촌장제, 400년 된 대동계 전통을 가진 곳에서 자랐고 고3때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단다. 스스로 '200년 전에서부터 온 소년같다'고 말하는 그는 수박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풀어 놓는다.

'나처럼 산골에서 살던 사람들에겐 우물이 냉장고 역할을 했다. 어쩌다 수박 한 덩어리가 생길 때면 큰 함지 가득 우물물을 채운 다음 거기에 수박을 담가두었다. 두꺼운 수박 표면을 생각한다면 실제 냉장효과는 별로였겠지만 마음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시원한 수박을 먹었던 것이다.' (문화일보, 2010년 8월 26일, 그때 그 여름 풍경)

필자가 어렸을 적 외가식구들과 여름휴가를 떠난적이 있다. 필자를 포함해 여자 아이들은 모두 여름 원피스를 입고 남자 아이들은 넥타이가 달린 남방을 입은 채 산에 올랐다.(이런 차림으로 산에 오른 걸로 보아 산은 아주 낮았던 것 같다.)

이제 막 시작된 풍요의 80년대, 어른들은 각자 제 식구들을 자가용에 태우고 캠프장에 모여 처음 산 텐트를 치고 코펠에 밥을 지었다. 그리고 역시 몇 번 쓰지 않은 아이스박스에서 맥주를 꺼내 더위를 달랬다.

맥주를 마실 수 없던 필자와 이하 '아이들'에게 외숙모는 수박을 나눠 주셨는데, 깔끔한 성격답게(외숙모는 식구들 속옷까지 다려 입히는 살림의 여왕이다) 수박 하나에 티슈 두 장씩을 주면서 아이들에게 당부했다.

"흘리지 말고 먹으렴."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아이들을 죄다 돗자리 가장자리에 세워두고 다시 밥을 지었다. 일렬로 서서 조심조심 수박 먹는 애들이 볼거리라도 된 양, 캠프장 사람들은 밥을 짓다 말고 필자 텐트 주변에 몰려들어 구경을 했고 구경꾼 중 한 명이 사진을 찍어 필자 집으로 보내주었다.

무릎보호대를 차고 수박 먹는 사촌동생들과 그 옆에서 수박즙이 옷에 묻을까 노심초사했던 필자와 형제들, 밥 지으며 노래 흥얼거리던 아버지와 외삼촌들의 모습만이 그 여름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한 장의 사진과 함께.

끈적한 날씨에 허당 수박을 먹으며 그 여름을 생각한다. 이제 여름은 여름인가보다.

'그대는 수박을 먹고 있었네/ 그대의 가지런한 이가 수박의 연한 속살을 파고들었네/ 마치 내 뺨의 한 부분이 그대의 이에 물린듯하여/ 나는 잠시 눈을 감았네// 밤은 얼마나 무르익어야 향기를 뿜어내는 것일까/ 어둠 속에서 잎사귀들 살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잠자코 수박 씨앗을 발라내었네/ 입 속에서 수박의 살이 녹는 동안 달은 계속 둥글어지고/ 길 잃은 바람 한 줄기 그대와 나 사이를 헤매다녔네// 그대는 수박을 먹고 있었네/ 그대가 베어문 자리가 아프도록 너무 아름다워/ 나는 잠시 먼 하늘만 바라보았네' (남진우, '달은 계속 둥글어지고')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