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옷, 그 이상의 속옷

현대 문명인에게 속옷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물건이다. 신체 중 가장 내밀한 곳의 청결과 보온을 유지시켜준다는 점에서 혹자는 제2의 피부라고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속옷을 매일 무의식적으로 입고 있지만 그 안에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과학기술이 숨겨져 있다. 박소란

최근 속옷 산업은 놀라운 수준으로 성장했다. 2008년 이전 줄곧 7,000~8,000억원대를 유지해 오던 시장규모가 2009년 1조원을 넘어서더니 작년에는 1조4,000억원대로 고공 점프를 한 것. 그리고 올해는 자그마치 2조원대 돌파를 내다보고 있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는 해외 브랜드 영업점의 대거 확충에 더해 할인점 내 속옷 판매가 증가한 결과다. 전체 속옷 판매량 중 할인점에서 소화되는 비율은 절반을 웃돈다. 또 원자재 값이 해마다 20% 가량 상승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일련의 상황은 속옷의 진화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징후다. 말하자면, 속옷 시장의 확대는 겉옷에만 치중하던 소비자들이 점차 속옷에 할애하는 비중을 늘리고 있다는 방증이며 이는 곧 소비자의 까다로운 구매성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속옷도 자연히 업그레이드 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70년대까지 합성섬유 사용

속옷은 사전적으로 겉옷 속에 인체와 직접 닿게 입는 옷을 총칭한다. 크게 피부의 청결 및 보온을 유지하는 언더웨어, 겉옷의 모양을 정리하고 체형의 결점을 보완하는 파운데이션, 그리고 장식을 겸한 란제리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우리가 가장 즐겨 입는 팬티와 브래지어 같은 기본 속옷이 전체 속옷에서 80% 이상을 차지한다.

현대에 들어 속옷은 몇 차례 의미 있는 변화를 겪게 된다. 그러나 사실 그 변화란 그다지 센세이셔널 한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상 팬티가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 고대 이집트 시절로부터 지금까지 팬티의 모양이 거의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몇몇 미세한 변화는 우리의 '속사정'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지난 20여년간 속옷계에 몸담아 온, 국내 1세대 속옷 전문 업체 BYC의 상품부 김학진 부장은 속옷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진화를 이렇게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 번째는 소재다. 1970년대까지 나일론 등 합성섬유를 사용했지만 이후 순면으로 소재가 변화했다. 두 번째는 패션화. 실용성만이 강조되던 속옷이 1990년대부터 인식변화와 함께 패션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기능성으로, 김 부장은 1990년대 후반 다양한 기능성 속옷이 등장하면서 속옷 기능의 확대,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고 설명했다.

시대별로 자세히 살펴보자면 1960~1980년대에는 아끼고 절약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 질기고 튼튼한 속옷이 대세였다. 때문에 소재도 나일론, 폴리(poly)처럼 비교적 질긴 것들이 쓰였다. 이후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생활수준이 높아지며 순면 속옷이 주를 이루게 된다.

물론 이때까지도 속옷은 무조건 청결, 보온 등 몸을 보호하는 기본적 기능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김 부장은 "당시 속옷은 워낙 값이 비쌌기 때문에 대부분 속옷을 사 입지 못하고 집에서 고쟁이 같은 것을 지어 입었다"며 "국내에 속옷 시장이 개척되기 시작한 1960~1970년대만 해도 내의 한 벌에 쌀 한 가마니 값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전했다. 첫 월급날 등 특별한 날에 어른들에게 내의를 선물하는 문화가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1990~2010년대부터는 속옷의 발달된 기술과 소득 수준의 향상으로 경제적인 요소 보다는 패션이 중시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1990년대 중반 속옷의 패션화 바람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은 '제임스딘', '보디가드'로 유명한 속옷 전문기업 좋은사람들. 후발주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회사는 기존과는 다른 차별성으로 시장을 공략, 눈부신 성공을 거뒀으며 이를 기점으로 젊은 층을 겨냥한 패션 속옷 시장이 그야말로 무섭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추세는 최근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일례로 올 4월 청바지의 대명사인 리바이스는 고급 폴리 에어로쿨 스판 소재를 사용해 땀 흡수 및 방출력을 높이고 겉에는 진(jean) 패턴을 실사 프린트한 속옷 '언더진' 시리즈를 선보였다. 속옷과 청바지의 경계를 허문 셈이다. 이처럼 디자인, 색상, 소재 등을 기존 속옷과 차별화한 패션 제품이 전체 속옷 시장의 60%를 웃돌고 있다.

"겉옷처럼" 최근 패션강조

즉 2000년대 이후의 속옷 트렌드는 '속옷의 겉옷화'란 말로 정리된다. 겉옷과 함께 속옷 역시 제대로 갖춰 입는 패션아이템으로 격상됐다는 얘기다. 여성들이 살갗과 함께 속옷이 겉옷 밖으로 훤히 드러나는 시스루(see-through) 의상에 브래지어를 그대로 노출시키거나 남성들이 바지 밖으로 팬티 상표를 드러내는 스타일도 출현했다.

이런 트렌드와 맞물려 소재에도 재미있는 변화가 생겼다. 몸의 실루엣을 살릴 수 있는 속옷을 선호하는 젊은층이 헐렁한 면 소재보다 오히려 피팅감이 뛰어난 나일론이나 폴리 속옷을 더 선호하게 된 것이다. 적어도 소재 부분에서는 1960~1970년대로 회귀한 셈이다.

이는 일부 우려도 낳고 있다. 몇몇 저가형 제품에 속옷 원단으로 적합하지 않은 커튼, 셔츠 등의 소재가 쓰이고 있는 탓이다. 김 부장은 "지나친 패션화로 인해 몸을 보호한다는 기본 원칙조차 지키지 못하는 엉터리 제품들이 넘쳐난다"며 "패션도 좋지만 속옷은 곧 피부와 다름없음을 소비자들이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속옷 트렌드는 어떻게 바뀔까. 많은 전문가들은 건강과 더불어 환경적 요인을 고려해 소비자에게 만족을 주는 상품이어야 미래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유기농 목화로 만든 '오가닉 코튼' 같은 친환경 소재로 만든 속옷 말이다.

한국니트산업연구원(KI²) 김영운 실용화기술개발팀장 역시 이에 동의한다. 김 팀장은 "기능·디자인·친환경성을 모두 갖춘 그린 제품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며 "황토, 콩, 숯 등의 천연 원료를 사용한 제품들이 백화점 등지에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아울러 김 팀장은 "아직은 시장성 때문에 많은 업체들이 유아용 속옷에만 집중하고 있지만 2~3년 후부터는 그린 속옷 제품이 대량으로 쏟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현재 숲속 식물들이 만들어 내는 살균성 물질인 '피톤치드(phytoncide)'를 이용한 신소재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오늘날의 속옷은 단지 속옷이라는 이름만으로 한정지을 수 없게 됐다. 또한 소비자들 역시 속옷, 그 이상의 속옷을 원한다. 얼마 전만 해도 저렴한 가격의 속옷이 대량으로 판매되는 일이 잦았지만 요즘은 가격이 저렴한 동시에 우수한 품질과 디자인을 갖춰야 소비자들의 입맛을 충족시킬 수 있다. 세 마리 토끼 모두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기능성 추가 "과학 입는다"

이 시점에서 속옷의 새로운 영역을 구축한 기능성 속옷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층 스마트해진 기능성 속옷은 발열, 냉감, 흡습, 항균, 소취, 원적외선 등의 효과를 갖춘 게 특징이다. 이들은 17세기 유럽 귀족사회에서 처음 선을 보인 코르셋처럼 체형의 결점을 보완하는 파운데이션 속옷과는 큰 차이가 있다. 파운데이션은 물리적 압박을 통해 신체를 보정하지만 1990년대 후반 등장한 기능성 속옷은 한층 과학적으로 몸을 '보완'한다.

기능성 속옷의 제작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 중 하나는 발열, 냉감 등 특수한 효과를 지닌 원료를 원단에 첨가하는 것, 다시 말해 염색과 같은 후(後)가공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특수 원료 자체에서 원사를 뽑아내 원사 조직 자체를 바꿔 원단을 만드는 방식이다.

얼핏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국수를 만든다고 할 때 국수를 다 만든 후 양념을 첨가하는 것이 후가공 방식이라면 밀가루 반죽 과정에서 양념을 첨가해 면을 뽑는 것은 원사 자체 처리 방식이다.

두 방식 중에는 아무래도 후자의 효과가 더 뛰어나다. 때문에 갈수록 후가공 방식보다 원사 자체 처리 방식이 선호된다. 일례로 BYC가 적외선 광발열 원리를 이용해 만든 발열내의 '보디히트'는 원사 자체에 특수 금속물질이 들어있다.

제조사에 의하면 인체나 태양에서 발생하는 적외선이 금속의 활발한 분자운동을 유도, 거의 반영구적으로 발열효과를 얻을 수 있다. 보디히트의 원료는 일본 방적회사에서 개발한 것으로 정확한 정체는 알려진 바 없다.

해당 방적회사의 독자 노하우여서 BYC측도 자세한 기전은 알지 못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발열내의는 가장 대중적인 기능성 속옷으로 꼽힌다. 시중에 나와 있는 발열내의 중 99%는 공기 중 수분을 흡수, 열로 발산하는 기능을 가진 써모기어 등 신소재가 적용돼 있다. 다만 써모기어는 수분을 소량 흡수했을 때는 발열 효과가 있지만 시간이 오래 지속되면 열이 빠져나가 몸이 차가워진다는 단점이 있다. 이의 개선을 위해 각 업체들은 새로운 기술 개발에 매진하고 있으며 보디히트 역시 그 산물의 하나다.

발열내의에 더해 좋지 않은 체취를 제거해주거나 피부 트러블을 막아주는 속옷, 컴퓨터·TV 등의 전자파를 차단해 주는 속옷, 입고만 있어도 신체 라인이 슬림해지는 다이어트 속옷 등 기능성 속옷의 종류는 다양하다.

패션·기능 점차 세분화

하지만 기능성 속옷이라도 그 효과를 단기간 내 직접 체감하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과연 믿고 이용해도 될까.

이에 대해 다수의 전문가들은 효과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김 팀장은 "아무런 처리를 하지 않은 제품보다는 분명한 이점이 있다"며 "눈에 보이는 변화가 미미하더라도 우리 몸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기여한다"고 말했다.

다만 김 팀장은 원가 절감을 위해 원료를 일정량 이하로 가미하고 광고만 그럴싸하게 내보내는 양심불량 업체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이유로 KI²에서는 소비자들을 대신한 검증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다.

김 팀장은 "피톤치드 소재를 예로 들면 아토피피부염 등에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대로 된 검증이 힘들었다"며 "조만간 아토피피부염 환자들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국내에는 약 60개의 속옷 브랜드 및 군소업체가 존재한다. 이들은 국내 시장 확대와 더불어 세계 시장 진출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전개 중이며 이미 미국, 유럽, 아시아 등지에서 고품질 제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는 국내 속옷의 품질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인 동시에 선진국과 국내의 속옷 트렌드가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김 부장은 "과거에는 선진국과 비교해 국내 속옷 트렌드가 1년 정도 뒤지는 감이 있었지만 2000년 이후로는 거의 같은 궤도에 올라 있다"고 진단했다.

차이가 있다면 국가별로 선호하는 색상과 디자인이 조금씩 다르다는 정도다. 알려진 바로는 한국과 일본은 화려한 원색, 미국과 유럽에서는 무채색 계열의 제품이 인기가 높다. 덧붙여 개방적 문화를 반영하듯 미국, 유럽의 디자인이 훨씬 과감하다고 한다.

김 부장은 "겉옷 시장의 패션성, 기능성, 다양성에 발맞춰 속옷 시장 또한 이제 세분화되는 과정으로 나아가고 있다"며 "앞으로는 콘셉트의 세분화, 타깃의 세분화, 기능의 세분화가 더욱 가속될 전망이다"고 전했다.

속옷의 진화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머지않아 우리는 속옷과 겉옷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네 번째 변화'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실용성만이 강조되던 속옷이 1990년대부터 인식변화와 함께 패션화되기 시작했다. 미래 속옷 시장에서는 건강과 더불어 환경적 요인을 고려해 소비자에게 만족을 주는 상품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17세기 브래지어는 내의 형태
1920년대 컵 삽입 제품 탄생

속옷의 양대산맥은 뭐니 뭐니 해도 팬티와 브래지어다. 이들은 언제 어디서 탄생했을까.

먼저 팬티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통상적으로는 팬티가 현재의 형태를 유지하며 실질적 기능을 갖기 시작한 때를 직물기술이 발달했던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로 본다. 당시 발명된 의복의 한 형태가 오늘날 속옷의 원형이 되어 팬티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팬티는 원래 남성의 전유물이었지만 프랑스혁명 이후 여성들도 승마 등 과격한 운동을 즐기면서 팬티를 입게 됐다는 얘기가 있다.

최근 들어 팬티에는 각종 기능성이 가미되기도 한다. 발열, 방취는 물론이고 체온을 조절해 남성의 정력을 촉진시키거나 한약재 추출물을 첨가해 여성질환을 개선하는 등 다양한 효능의 팬티가 이미 출시돼 있다.

여성 속옷의 상징인 브래지어는 기원전 2500년경 지중해 크레타섬의 여성들이 가슴을 돌출시키기 위해 가슴 아래를 천으로 감싼 것을 그 원조로 본다. 이후 고대 로마와 중국에서 철이나 나무로 브래지어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과 비슷한 형태의 브래지어는 대다수 파운데이션 속옷들이 그렇듯 17세기에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창기의 브래지어는 내의 형태로 입고 벗기가 다소 불편했다고 한다.

1900년대 들어서야 현재와 같은 미니멀한 스타일로 진화했다. 1920년대 러시아 출신의 재봉사 아이다 로젠탈이 컵을 삽입한 브래지어를 만들었고 1930년대 나일론의 발명과 함께 브래지어는 대중적으로 확산됐다.



기자 psr@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