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왜곡이 촉발한 반일감정, 민족주의 물결타고 확산일로급속한 경제성장 바탕으로 지역질서 재편·미일 동맹 견제 의도

중국 반일시위 격화, 동북아 패권경쟁 불 붙다
교과서 왜곡이 촉발한 반일감정, 민족주의 물결타고 확산일로
급속한 경제성장 바탕으로 지역질서 재편·미일 동맹 견제 의도


4월16일 상하이에서 시위 학생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며 반일구호를 외치고 있다.

16일 오전 9시, 중국 개혁ㆍ개방의 최대 성과 물이자 경제 수도인 상하이(上海) 황푸(黃浦)강 서쪽의 와이탄(外灘) 광장.

‘일본제국주의 타도’와 ‘일본제품 구매 반대’를 외치는 수 천명의 시위군중이 시내 인민광장을 통과해 일본 총영사관으로 향했다. 그 순간 군중은 수 만 명으로 불어났다. 언뜻 보기엔 산만해 보이던 시위대가 갑자기 단일대오를 이루며 조직적 역량을 과시하듯 행진하기 시작했다.

거리는 온통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五星紅旗)의 물결을 이뤘고, 시위 선봉대는 ‘위대한 중화’를 건설하려는 오늘의 신(新) 지도세력처럼 단호한 기세를 보였다.‘중화민족 만세’를 열창하던 시위대는 일본 총영사관이 가까워 오자 보도블록을 깨 일제히 공관 유리창을 향해 던졌고, 일부는 페인트와 달걀 세례를 퍼부었다. 거리는 온통 아수라장이 됐다.

일부 군중들은 일본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구베이(古北) 지역을 돌며 일본 식당과 가게 간판을 부쉈고, 도로에 있는 일제 도요타 자동차를 뒤집어 엎기도 했다.‘중화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린 소(小) 일본은 마땅히 응징 돼야 한다’는 분위기가 거리를 압도했다. 중국 공안당국도 “일본이 자초한 일”이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돌을 던지는 시위대를 적극 제지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 역력했다.

5ㆍ4 기념일 시위 확대되나
일본 교과서 왜곡으로 촉발된 중국의 반일시위가 4월 들어 3주째 이어지면서 5ㆍ4 항일운동 기념일인 다음달 4일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이 날은 특히 1일부터 일주일간 이어지는 노동절 연휴의 중간에 끼어 있어 전국 주요 도시에서 열리는 기념식이 반일시위로 번질 가능성마저 점쳐지고 있다. 격화된 반일감정이 민족주의 물결을 타고 결코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동안 반일시위에 대해 방관하는 듯한 자세를 보여온 중국 당국이 입장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반일 시위 발생이래 처음으로 지난 주 당 기관지를 통해 시민들의 자제를 호소하는 글을 싣는 등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대일 갈등을 봉합하려는 수순에 돌입했다. 인민일보는 18일자 시평에서 “애국주의는 가장 고상하고 신성한 감정이자 신념”이라며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안정만이 중국 인민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강조했다.

중국 인민의 ‘자발적인 정서’의 표출은 이미 충분히 일본에 그 위력을 보여줬다는 정치적인 판단과, 갈등이 더 악화하면 중국으로서도 유리할 게 없다는 계산이 작용한 셈이다. 특히 중국 당국으로서는 시민들의 거리시위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커질 경우 반일 시위가 자칫 반정부 투쟁으로 변질될 가능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반일 시위를 독려해온 중국의 민족주의 성향의 웹사이트들도 일본 시민들에 대한 공격 자제를 호소했다. 일본의 중국침공이 시작됐던 1931년 9월18일에서 이름을 딴 웹사이트 ‘9-18닷컴’은 성명을 통해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 우익분자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정치인들을 반대한다”면서 “우호적인 일본인들은 품 안에 있는 우리의 형제이고 친구”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웹사이트인 ‘애국동맹 넷’도 “폭력은 민족주의자들의 대의 명분을 손상시킬 것”이라며 폭력 자제를 호소했다. 결국 중국의 입장에서도 더 이상의 반일시위 확대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부담스럽다는 결론을 내린 셈이다.

4월17일 홍콩의 젊은이들이 오성홍기를 흔들며 반일구호를 외치고 있다.<로이터>

‘차이나 리스크’
중국에서는 요즘 특별한 휴대폰 문자메시지 보내기가 유행하고 있다.

“우리가 일본제품 100위안(약 1만3,000원)어치를 구입하면 일본 자위대에 총알 10개를 만들어주는 것이며, 왜곡된 역사교과서 8쪽을 제작케 합니다. 5월1일부터 6월1일까지 일본제품을 구매하지 맙시다.” 이 문자 메시지를 받은 사람은 친구 20명에게 이를 전파하자는 ‘일제 불매 문자메시지 운동’이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과 유엔 안보리 상임위 진출 시도로 촉발된 중국의 반일 시위는 외교 관계 뿐 아니라 양국간 경제교류에도 타격을 입히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서로 냉정한 입장을 보이더라도 경제협력 분야에서는 뜨거운 열정을 쏟는다는 양국간의 ‘정냉경열(政冷經熱)’ 원칙에 금이 가고 있다.

‘차이나 리스크(중국 위험)’에 화들짝 놀란 쪽은 일본이다.

18일 일본 도쿄 주식시장에서는 반일 시위로 중국진출 일본기업의 수익이 악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면서 주요 중국 수출품목인 자동차와 철강 등의 종목이 곤두박질쳤다. 정치적 갈등이 경제로까지 파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중국과 일본간 교역 규모는 1,780억 달러로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일본의 교역대상 1위 국가로 부상했다.

지난해 도요타와 혼다 등 일본 자동차업체만 해도 중국에 50억 달러를 투자하는 등 지난 5년간 일본의 대중국 투자액은 230억 달러에 육박한다. 더욱이 일본 경기의 회복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상당부분 중국 고도 경제성장에 의존하고 있다. 일본 기업의 중국진출이 늘면서 일본 부품 수출이 늘어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 기업에게는 이번 사태가 ‘차이나 리스크’를 다시 한번 확인 시켜준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일본으로서는 이 같은 위기에서 빠져 나오기가쉽지 않아 보인다. 일본 기업인들은 한결같이 ‘일본이 경제적으로 너무 깊이 중국에 발을 담가버렸다는 것’을 자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ㆍ일의 패권주의 경쟁
중국의 반일시위로 촉발된 일본과의 대립은 동북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두 거인의 자존심 대결이라는 시각도 만만찮다.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아시아 지역의 패권 국가로 발돋움 하려하고 있고, 일본 역시 군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역내 안보에 있어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헌법 개정을 추진 중에 있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는 거의 성장을 멈췄고 인구는 줄어들고 있는 반면 중국경제는 지난 25년간 연평균 25%의 성장을 거듭해 왔으며 2020년이면 경제적으로 일본을 따라 잡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동북아 지역의 세력 균형은 중국쪽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지고 있다. 더욱이 중국은 일본과 달리 이미 핵 보유국이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 이사국이다. 일본 게이오대 동북아연구소의 고쿠분 료세이 소장은 “역사상 대부분의 시기에 동북아 지역에서 압도적 우세를 점해온 국가는 중국이었고, 일본은 20세기에 와서야 등장했다” 면서 “21세기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양국이 대등한 입장에 놓이게 됐다”고 해석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일 동맹을 강화해 일본에 북한, 대만 등 분쟁지역의 억제자 역할을 맡기겠다고 하는 미국의 의도는 중국의 불안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또 이 같은 미국의 의도가 중국의 민족주의를 자극시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중국의 반일시위 이면에는 미국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깔려 있다는 해석도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

장학만 국제부 기자


입력시간 : 2005-04-27 16:04


장학만 국제부 기자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