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치안 불안과 사회안전망 퇴보에 대한 불안이 반대표로 분출유럽통합 주도국 체면 엉망, 다른 회원국의 부결 도미노 부를 수도

佛유럽헌법 비준 부결, 시라크 失政에 민심 '보복의 표'
경제·치안 불안과 사회안전망 퇴보에 대한 불안이 반대표로 분출
유럽통합 주도국 체면 엉망, 다른 회원국의 부결 도미노 부를 수도


5월30일 프랑스 신문들은 유럽 헌법 비준 국민투표 부결기사로 1면을 장식했다.

부결로 판가름 난 지난달 29일 프랑스의 유럽헌법 비준 국민투표는 결과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파장은 엄청났다. “설마” 하는 안이한 생각도 있었겠지만 부결될 것을 대비해 취할 대응책이 마땅치 않았던 탓이다. 프랑스의 국민투표 비준은 그만큼 다른 탈출구가 없는, 유럽연합(EU)에는 절실한 것이었다.

프랑스 비준 실패가 충격을 더한 데는 프랑스가 독일과 함께 유럽의 정치적 통합을 주도해 온 양대 주축국이었다는 점, 앞서 회원국 중 9개국이 모두 비준을 찬성한 뒤 나온 첫 실패였다는 점, 사흘 뒤인 1일 치러진 네덜란드의 국민투표가 또다시 부결되는 데 부정적 영향을 미쳐 앞으로 남은 회원국 비준절차에 부결 도미노를 부를 수 있는 첫 단추 역을 했다는 점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특히 지난 50여년 간 진행된 기나긴 유럽통합 작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온 프랑스가 통합의 사실상 마지막 단계였던 이번 정치적 통합과정에서 반대 목소리를 낸 것은 충격과 동시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프랑스 국민은 왜 통합에 반대했을까.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반대표를 던진 민심의 불만은 우선적으로 자크 시라크 대통령 정부를 향한 것이라는 점이다. 잇단 경고음이 터져 나오는 경제문제, 불안해지는 치안, 사회안전망의 퇴보 등 각종 정부시책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이번 국민투표를 통해 분출됐다는 것이다.

시라크 정부에 대한 신임투표로 비준투표가 변질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만약 정치ㆍ사회적 여건이 지난해 하반기만 같았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소리도 나온다. 시라크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일부 회원국이 채택한 것처럼 의회에서 비준절차를 밟으라는 측근의 조언을 무시하고 국민투표 강행을 밝힌 것은 급변한 여론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는 재투표 가능성은 프랑스 국민이 유럽헌법에다 정권에 대한 화풀이를 한 것이라는 이 같은 시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프랑스 이익 훼손' 위기의식
유럽헌법이 규정한 정치통합이 프랑스의 이익을 훼손할 것이라는 위기의식도 크게 작용했다. ‘유럽합중국’이 탄생하면 미국에 대항하는 공룡이 될 지 모르지만 유럽의 맹주를 자처하는 프랑스의 자존심은 공룡의 배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우파와 좌파는 모두 나름대로 논리로 유럽헌법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우파는 유럽통합으로 프랑스의 주권이 상당부분 상실될 수 있고, 동구권의 값싼 노동력이 밀려들어와 가뜩이나 불안한 고용시장을 더욱 나쁘게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재 프랑스의 실업률은 10%가 넘는 수준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올해 프랑스의 경제성장률은 1.42%로, 영국(2.41%), 미국(3.61%)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유럽헌법이 비준되면 유럽 최대인구를 갖고 있는 독일이 유럽의회에서 가장 많은 표결권을 갖게 되는 것도 프랑스 국민의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터키의 EU 가입 문제는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500만 명의 무슬림이 있는 프랑스는 이슬람 국가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

최근 일어나고 있는 각종 치안사건이 상당부분 무슬림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고, 무슬림의 히잡 착용과 같은 문화충돌이 예민한 사회문제로 비화하고 있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터키의 EU 가입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노조를 중심으로 한 좌파는 경제ㆍ복지 부문에서 ‘앵글로색슨 자본주의’라는 신자유주의의 침투를 경계했다. 보조금 폐지, 규제 철폐, 노동의 유연성, 자본 개방 등을 내용으로 하는 유럽통합은 곧 ‘미국_영국 식 자본주의로의 예속’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복지와 고용을 근간으로 하는 유럽 전통 좌파들의 반발을 샀다. “유럽이 창출하려는 거대 시장이 프랑스의 사회보장을 파괴한다”는 주장이다.

프랑스 비준 부결로 인한 파장은 이미 곳곳에서 불거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부결 다음날인 30일 유로화?유로권 확대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확산되면서 달러화에 대해 7개월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유럽경제의 통합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어 스태그플레이션(경제불황 속 물가상승)에 직면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네덜란드 마저 유럽헌법을 거부해 이제 비준절차가 남은 14개 회원국의 유럽통합에 대한 민도는 급속히 냉각될 것으로 우려된다. 당장 프랑스에 이어 네덜란드에서도 부결되면 아예 비준 투표를 취소할 것이라고 밝힌 영국이 내년 상반기 예정된 국민투표를 어떻게 처리할 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유럽통합에 대한 반대여론이 강해 국민투표가 정치적 쟁점이 된 영국 정부로서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부결사태가 비준 과정을 철회할 수 있는 명분을 준 것이다.

헌법안 골자, 별도 협약 채택 예상
향후 유럽헌법의 운명은 상당히 불길하다. 그렇다고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2007년 발효를 목표로 하는 유럽헌법은 4조에서 “25개 회원국 모두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잇단 부결로 헌법이 원안대로 채택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비준이 거부되는 사태에 대비한 부속합의서에서 “2년 뒤(2006년 10월)까지 회원국 5분의 4(20개국)가 비준하고 1개 또는 그 이상의 국가에서 헌법이 부결되면 이 문제를 유럽이사회(정상회의)에서 논의한다”고 명시해 ‘탈출구’를 만들어 놓고 있다. 부결국가가 소수이면 정상회의에서 해당국가를 상대로 재투표를 실시하거나 헌법의 일부 조항을 수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달 16~17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리는 정례 유럽 정상회의는 유럽통합 장래를 결정지을 분수령이 될 것이란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부결국가를 상대로 한 재투표는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시라크 대통령이 “재투표는 없다”고 공언한데다 부결하는 국가가 많아질 경우 일일이 이들 국가를 상대로 재협상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재협상이 없을 경우 재투표는 불가능하다.

대신 EU 회원국들은 헌법안의 골자를 별도 협약으로 채택하는 방법을 택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통령은 뽑지 않고 외무장관 자리만 신설하는 것과 같은, EU의 권한을 좀 줄이고 회원국 주권은 좀 더 인정하는 강도 낮은 정치적 통합을 대안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통합 과정에서 EU가 겪은 위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54년 EU 6개국(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간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한 유럽방위공동체(EDC) 조약이 프랑스 하원에서 부결됐다. EU 지도자들은 이로 인해 경제로 눈을 돌려 57년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창설했다.

이후 공동방위 정책에 대한 시도를 재개하기까지 4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65년에는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이 EEC 각료이사회 의사결정 방식을 만장일치에서 다수결로 전환하는 방안에 반대했다. 이는 회권국들이 국가 중대사로 여겨지는 사안에 대해 거부권을 갖는 계기가 됐다. 이밖에 92년 덴마크의 마스트리히트 조약 부결, 2001년 EU 확대와 제도개혁에 합의한 니스조약이 아일랜드에서 부결되는 등 모두 5차례 우여곡절을 겪었다.

유럽헌법 주요내용

▲ EU 대통령직 신설=임기 2년 6개월. 한차례 연임 가능.

▲ 외무장관직 신설=현 외교정책 대표와 대외담당 집행위원 기능 통합.

▲ EU 집행위원회 축소=집행위원회 위원을 현 30명에서 25명으로 축소. 2014년까지 전체 회원국 수의 3분의2가 되도록 조정.

▲ 조건부 다수결 도입=민감한 사안을 제외한 정책 결정은 EU 인구의 최소 65%와 회원국 수의 최소 55%(15개국)가 동의해야 하는 이중다수결 채택. 외교ㆍ국방ㆍ조세 정책 변경은 만장일치.

▲ 유럽의회 의원수 증가 및 권한 강화=현 732명에서 최대 750명까지 정원 확대 가능. 정책감시 및 입법권 강화.

▲ 법적 지위=EU를 국제조약 체결권을 가진 법적 주체로 규정.

▲ 시민권=회원국 국민은 누구나 EU 시민임을 명시.

▲ 탈퇴 조항=EU 법령 중 최초로 신설. 회원국이 결정하면 탈퇴 가능.

▲ 기본 인권에 관한 헌장=사상 최초로 명시. 영국은 고용에 관한 법률 등 민감한 사안에서는 EU 헌법이 국내법에 우선하지 않는다고 확인.


황유석 기자


입력시간 : 2005-06-08 16:42


황유석 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