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똥 튈라…美 정가 전전긍긍

한때 미국 로비 업계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잭 아브라모프가 일으킨 초대형 로비 스캔들이 미국 정가를 뒤흔들고 있다.

규모면에서 미국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렵다는 이번 부패 스캔들의 파장은 미국 의회를 넘어 백악관, 언론계 등에도 번져가고 있다.

이른바 ‘아브라모프 스캔들’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막역한 정치적 동지로 통하던 톰 딜레이(텍사스) 전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 등 공화당의 핵심 수뇌급 인사들이 대거 연루돼 있다는 점에서 그 폭발성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아브라모프가 3일 감형을 조건으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고 검찰의 수사에 협조키로 하는 이른바 ‘플리 바긴’을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입은 살생부나 다름없는 공포의 대상으로 떠오른 상태다.

현역 의원 포함 거물급 검은돈 수수

아브라모프의 협조를 바탕으로 의원, 행정부 고위 공직자들을 대상으로 한 미국 검찰의 수사망은 시시각각 좁혀지고 있다.

줄잡아 20~30여명의 고위 인사가 뇌물 수수 등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데 이 가운데 현역 의원 2명을 포함한 6~7명의 거물급이 사법처리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흘러 나오고 있다.

미국 CNN 방송은 12일 검찰 수사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 미국 하원 행정위원장 밥 네이(공화ㆍ오하이오) 의원 등 최소한 2명의 현역 의원이 뇌물 수수 혐의 등으로 사법처리될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네이 의원은 아브라모프에게 자신의 사무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의회에서 아브라모프가 요청한 발언을 해주는 대가로 스코틀랜드에서의 호화골프, 스포츠행사 관람권 등의 향응을 제공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별도의 정치자금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뒤에도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에 복귀하겠다고 공언해온 딜레이 의원은 아브라모프 파문이 확산되자 결국 대표 복귀 의사를 접는 등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아브라모프의 정치적 후견자로 통하던 딜레이 의원은 아브라모프의 유죄 인정 이후 자신에 대한 당 안팎의 비판과 불신이 폭발직전 상항으로까지 치닫자 버티기를 포기했다.

딜레이 의원은 아브라모프로부터 정치자금으로 최소한 5만7,000달러를 받은 것 외에 아브라모프와 함께 한번에 10만 달러가 넘게 드는 스코틀랜드 초호화 골프여행을 다니는 등 각종 향응을 제공받아 왔다.

딜레이 의원은 당내 반대 세력인 제프 플레이크(아리조나) 의원 등이 새로운 대표를 선출해야 한다는 탄원서를 돌리기 시작한지 하루 만에 서명 의원이 25명을 넘어서자 손을 들고 말았다.

아브라모프가 받고 있는 혐의는 인디언 부족들로부터 카지노 사업 허가와 관련된 로비 청탁을 받고 8,000만 달러 이상을 받아 그 중 일부를 착복하고 의원 등에게 입법지원 활동 명목으로 뇌물을 제공해 왔다는 것이 핵심이다.

아브라모프는 또 지난 2000년 1억4,750만 달러를 주고 선크루즈 카지노 선박을 사들이는 과정에서 6,000만 달러의 융자를 받기 위해 2,300만 달러의 기부금을 입금한 것처럼 송금전표를 위조한 혐의도 받고 있다.

이 같은 검은 돈의 상당부분이 미국 정ㆍ관계에 흘러 들어간 것이 포착돼 미국 연방수사국(FBI)에서 차출된 30~40명의 전담요원이 투입된 방대한 수사가 시작된 것이다.

초 긴장 상태에 빠진 고위 인사들은 딜레이, 네이 의원 등만이 아니다. 존 두리틀(공화ㆍ캘리포니아)하원 의원, 콘래드 번스(공화ㆍ몬태나) 등이 검찰의 수사망에 올라 있고 스티븐 그릴스 전 내무부 부장관도 인디언 부족에게 카지노업을 허가해 주는 문제와 관련해 아브라모프가 뇌물을 제공한 대상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딜레이 의원의 측근이었던 마이클 스캔론도 이미 유죄를 인정한 상태에서 검찰의 수사에 협조하고 있다.

전방위로 번지는 파장…백악관도 망신

아브라모프 스캔들은 딜레이 의원의 후임으로 공화당 2인자인 하원 원내대표를 새로 뽑는 경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 폭스뉴스는 12일 그 동안 유력한 차기 원내대표 후보로 꼽히던 로이 블런트(미주리) 의원도 딜레이 의원과 마찬가지로 아브라모프와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었다고 폭로했다.

폭스뉴스에 따르면 원내대표 대행을 맡고 있는 블런트 의원이 아브라모프의 고객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유리한 편지를 3차례나 써준 것으로 드러났고 이렇게 해서 마련된 정치자금은 블런트 의원 아들의 선거운동 비용으로 쓰여진 것으로 드러났다.

공화당을 휘감고 있던 아브라모프의 검은 커넥션이 또 다른 거물인 블런트 의원에게도 미치고 있고 그 결과, 블런트 의원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원내대표를 놓고 경합중인 존 보이너(오하이오) 의원에게 승리를 헌납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백악관에도 망신살이 뻗쳤다. 백악관측은 최근 아브라모프로부터 정치자금 명목으로 받은 6,000달러를 미국 심장협회에 기부하는 방법을 통해 ‘반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아브라모프가 유죄를 인정하자마자 백악관측이 바로 꼬리 자르기에 나선 것은 아브라모프와 부시 대통령 사이에 연결돼 있는 끈을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2004년 부시 대통령 재선 선거운동 과정에서 아브라모프가 주선한 모금 액수는 10만 달러를 넘는다는 것이 정설인 상황에서 고작 6,000 달러를 돌려주겠다고 나선 것은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스콧 매클렐런 백악관 대변인은 아브라모프가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그가 몇 차례 백악관 리셉션에 참석했으나 부시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그를 알지 못하며 만난 것을 기억하지도 못한다”고 얼버무려야 했다.

백악관 뿐만 아니라 아브라모프로부터 받은 ‘정치자금 반환하기’는 미국 정가에서 러시를 이루기도 했다. 딜레이 의원도 최소한 5만7,000달러를 돌려주겠다고 했고 블런트 의원도 8,500달러를 반환하겠다고 말했다.

밥 네이 공화당 하원의원은 6,500달러의 반환의사를 밝혔고 앞서 데니스 해스터트 하원의장도 돌려주기 러시에 편승하는 등 반환 액수만 해도 50만 달러에 육박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브라모프 스캔들’은 언론계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브라모프의 고객 가운데에는 미국의 ‘잡지 발행인 협회(MPA)’가 포함돼 있었는데 MPA는 2000년에 우편요금 인상을 저지하기 위해 아브라모프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국에서의 잡지 배달은 거의 전적으로 우편에 의존한다. MPA는 아브라모프에게 로비 대가로 140만 달러를 지불했고 또 이와는 별도로 아브라모프의 권유로 한 비영리단체에 2만5,000달러를 기부했는데 이 돈이 결국 딜레이 의원의 측근에게 흘러 들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언론계의 일부 칼럼니스트들이 아브라모프로부터 돈을 받고 로비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유리한 칼럼을 쓴 것으로 드러났는데 케이토 연구소의 더그 밴도우 선임연구원은 20여건의 기고문을 쓰면서 건당 1,000~2,000 달러를 받았고 정책혁신연구소(IPI)의 사회보장 전문가 피터 페라라 선임정책 자문역도 기고문 대가로 돈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거세지는 로비 제도 개혁 요구

미국의 대부분 로비 회사들은 백악관과 의회에서 가까운 워싱턴내 K 스트리트에 밀집해 있다. 2005년 현재 미국 의회와 법무부에 등록된 로비스트 수는 3만5,000여명에 육박하고 있는데 이는 불과 5년 사이에 2배가 늘어난 수치다.

1995년 미국 공화당의 의회 장악에 이어 2001년 부시 대통령의 취임으로 공화당이 명실공히 대세를 점하게 되자 K 스트리트도 ‘공화당 판’으로 바뀌었다.

아브라모프는 바로 이러한 풍토에서 자라난 공화당식 로비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올해 11월 의회 중간선거를 앞두고 아브라모프 스캔들이 미칠 파장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 공화당 내에서도 로비 관행을 개혁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미국 하원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개혁 방안 가운데에는 로비스트들의 재산 공개와 관련, 1년에 두 번 하던 것을 네 번으로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포함돼 있다.

또 로비 대상자, 즉 의원이나 고위 정부 공무원들이 어떤 로비를 받았는지를 공개하는 방안이 제시되고 있고 공무원들이 사적인 경비를 지원 받아 여행을 할 때 여행 경비의 구체적 내역과 여행 일정을 일반에 공개하는 것도 개혁 방안에 올라 있다.

미국 정치 일번지인 수도 워싱턴에서는 아예 정치자금 모금을 금지해야 한다는 원천 봉쇄적 아이디어도 있고 인터넷을 활용, 로비스트와 정부 공무원, 또는 선출직 공무원들이 접촉하는 상황을 주별로 그때 그때 인터넷에 올려 공개하자는 방안도 제기되고 있다.


워싱턴=고태성특파원 tsg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