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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 '인류의 스승' 제14대 달라이 라마를 만나다
"북한은 변할것입니다,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대담: 황필호 강남대 대우교수

1. 프롤로그: 드디어 성하를 만나다

티베트 망명 정부의 수반,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티베트 난민의 유일한 희망, 정치나 폭력보다는 비폭력의 고양을 통해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 현존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월드 스타, 그러면서도 신비스러운 환생의 고리를 그대로 잇고 있는 인물, 7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 경전과 일반 서적을 탐독하는 살아있는 인류의 스승.

그분이 만면에 웃음을 띠면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회견장 안으로 들어왔다. 때는 2005년이 저물어가던 12월 17일 오후 1시 10분.

나는 두 손을 합장하고 그를 기다렸다. 드디어 그는 달 덩어리와 같은 후광도 없이, 우리와 똑같은 소박한 한 인간으로 나의 앞에 앉았다.

우리들의 거리는 2m가 조금 넘을 정도다.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하면서 벌떡 일어나 영어로 단독 회견의 서두를 시작한다.

우리는 이미 영어로 친견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통역을 사용하면 시간을 많이 소비할 뿐만 아니라 감동의 직접 전달이 자주 끊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하의 영어 실력은 어떤 단어의 발음은 뚜렷하지 않을 때가 있어도 개념 분석에 대하여는 나의 능력을 훨씬 능가한다.

그러나 내가 당황한 진정한 이유는 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나는 어떤 일에도 두려움이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성하의 걸상과 내 걸상의 높이가 같은 것이 아닌가. 내가 어떻게 감히 성하와 동일한 높이에 앉을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아무래도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당황한 것이다.

2. 성하의 스마일 페이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병든 몸을 이끌고 인천-방콕-뉴델리-파탕콧-다람살라로 오면서 속으로 수없이 동일한 질문을 반복했다.

도대체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면서, 어느 경우에는 13시간에 걸친 냄새나는 침대칸 기차를 타면서까지 성하를 만나야 하는가.

그가 노벨 평화상을 탄 유명인이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듯이, 그는 보살(보디사트바)의 화신이기 때문인가? 나는 명확한 답변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다.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그의 망명 정부까지 찾아온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내가 그의 웃는 얼굴(a smiling face)에 홀딱 반했기 때문이다.

그는 1950년대 말 당시 1만 명 이상의 티베트인들이 마오쩌둥의 피비린내 나는 점령군에 의해 죽는 슬픔을 직접 체험했다.

그럼에도 그는 중국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마음 속으로는 웃을 수 있는 분이다.

여기서 우리는 웃음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인간만이 웃을 수 있다. “저 송아지가 웃는다”는 표현이야말로 웃기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 사회적 동물, 도구를 만드는 동물, 종교적 동물 등과 마찬가지로 웃는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프랑스 작가인 라블레(1494-1553)가 웃음을 인간의 고유한 속성으로 설명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은 웃는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그러나 웃음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우선 치아를 전부 내보일 정도의 파안대소가 있고, 치아를 절반쯤 보이는 중도형 웃음이 있고, 치아를 전혀 보이지 않는 모나리자 형 웃음도 있다.

성하의 웃음은 물론 이상의 모든 웃음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성하는 얼굴을 활짝 펴고 웃는 파안대소, 손바닥을 치거나 콧등을 비틀면서 웃는 박장대소, 목을 놓고 웃어대는 너털웃음뿐만 아니라 눈으로만 살짝 웃는 속웃음을 짓기도 한다.

이번 대담 중에도 그는 아마 15번 이상 큰 소리로 웃었다.

언제나 웃을 수 있는 능력, 이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에서만 나오는 웃음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변은 그의 웃음이 결국 그가 도달한 고차원의 영성(spirituality)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다.

그래서 중국계 출신인 찬(Victor Chan)은 이렇게 말한다.

달라이 라마의 박력있는 임재(臨在)는 그가 도달한 고차원의 영성의 깊은 우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의 유명한 친애감은 그의 영적 성취의 표현일 뿐이다. (His Holiness The Dalai Lama & Victor Chan, The Wisdom of Forgiveness, Riverland Books, New York, 2004, pp. 11-12.)

과연 성하의 웃음은 영성과 관련이 있는가? 그래서 우리는 영성이 깊을수록 웃는 얼굴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웃음을 잃은 사람의 영성은 거의 없거나 극히 낮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연속적으로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웃는 얼굴과 영성은 과연 어떤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둘째, 성하의 웃는 덕목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것인가, 혹은 태어난 다음에 후천적으로 개발한 것인가?

셋째, 이런 태도를 개발하는 특수한 수양 방법은 무엇인가?

성하는 첫째 질문에 대하여는 별로 언급을 하지 않고 둘째와 셋째 질문에 대하여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소상히 설명했다.

원래 그의 형제들은 유머를 즐기면서 자랐으며, 성장하면서는 엄격한 수양 생활을 했다. 이렇게 보면, 언제나 웃을 수 있는 당신의 능력의 절반은 선천적인 재질이며 나머지 절반은 후천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첫째 질문에 고착해 있다. 나는 이미 웃는 얼굴과 영성의 상관 관계를 인정하고 있으며, 다만 그들이 서로 상관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 것이냐는 질문에 관심을 집중하다가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첫째, 항상 웃는 얼굴과 영성이 관련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그 웃음이 어린애의 순진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애와 같이 순수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역시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투투 대주교는 성하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는 위대한 분입니다. 나는 그를 사랑합니다. 우리 두 사람은 다같이 위대한 장난꾸러기의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우리 속에는 언제나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하는 어린애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어린애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어린애는 모든 것에 대한 경탄의 감정(sense of wonder)을 가지고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도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성하’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그는 성스러운 분입니다. 그래서 특히 젊은이들은 성하의 이런 매력에 즉시 몰입합니다.

젊은이들은 진실하지 않은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을 재빨리 알아차립니다. 그들은 달라이 라마가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Chan, 앞의 책, pp. 64-65.)

둘째, 진정 울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 웃을 수 있고, 진정 웃을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 울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 진정 통곡할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위해 목숨까지 희생할 수 있으며, 타인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상학을 오랫동안 연구한 어느 서양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기쁠 때 그는 100% 기쁜 것이다. 그 감정을 불순하게 하는 다른 어떤 상념도 끼어 들 수 없다.” (Chan, 앞의 책, p. 36.)

이런 생각을 하던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이렇게 고백한다. “저도 젊었을 때는 언제나 웃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슬픈 얼굴을 짓기가 굉장히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는 평소에는 찡그린 얼굴로 살고 있으며, 웃으려면 일부러 웃으려고 노력해야 됩니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모든 사람에게 자비심을 가져야 합니다.”

“네?”

“남을 돕는 것이 바로 나를 돕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자비심은 현명한 이기주의(wise selfishness)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끓어오르는 눈물을 꾹 참는다.

3. 대담

나는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성하를 보살 혹은 석가의 화신으로 믿고 있는데, 과연 성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성하님은 누구의 화신입니까?”

“나는 전생의 나의 화신입니다.”

“그렇다면 성하님은 보살의 화신이나 석가의 화신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나는 단순한 불교의 승려일 뿐입니다.”

“네?”

“나는 여러분과 동일한 한 사람의 승려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도 성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아직 보살이 아니며, 보살심을 충분히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마치 산의 정상을 본 사람과 비슷하다. 즉 나는 아직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곧 정상에 도달할 것이라고 느낀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문자 그대로 읽으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성하님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대하여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까? 왜 성하님은 자신이 보살의 화신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당신을 보살의 화신이라고 믿고 있도록 그대로 놔두고 있습니까?”

“물론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600만 명의 티베트인들과 특히 조국을 떠나 난민으로 살고 있는 15만 명의 티베트인들은 나를 정치적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으며, 이런 뜻에서 나는 그들을 돌봐야 할 도덕적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나에 대한 사람들의 이미지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나는 나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과연 내가 현재 생활에서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보살의 화신으로 볼 수도 있고, 또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정말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불교는 무신론인가?

성하는 여러 번 불교는 무신론이라고 말했다. 물론 불교는 신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를 무신론이라고 부르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우선 불교는 마르크시즘과 비슷한 무신론이 아니며, 유신론을 반대하면 자동적으로 무신론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유신론(theism)과 무신론(atheism) 사이에 비신론(non -theism)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비신론이란 신에 대한 존재나 비존재를 논의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예를 들면 고통이라는 발등의 불을 먼저 끄기 위하여 그 문제는 나중으로 돌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비신론은 일원론도 아니고 다원론도 아닌 불이론(不二論)을 주장하는 불교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특히 원시 불교는 전형적인 비신론의 종교라고 나는 믿는다. 신은 존재하는가?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이런 문제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질문들이다.

그러나 욕망의 화택(火宅)에서 벗어나는 것, 그것이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뜻에서 불교는 유신론도 아니고 무신론도 아니다. 오직 비신론일 뿐이다. 성하는 나의 이런 주장에 동의했다.

1. 유신론 (기독교)

2. 무신론 (마르크시즘)

3. 비신론 (불교, 유교)

궁극적 실재는 인격적(personal)인가, 혹은 비인격적(impersonal)인가?

“성하님이 인정하듯이, 오늘날 우리는 모든 종교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종교 복수주의 원칙(the principle of religious pluralism)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으며, 그래서 모든 종교는 서로 협동해야 됩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종교와 종교 사이에는 여러 가지 우연적인 차이(accidental differences) 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차이(essential differences)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서 불교인은 궁극적 실재를 비인격적(impersonal)으로 표현하지만 기독교인은 그것은 인격적(personal)으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차이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며, 결국 신에 대한 해석의 문제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바로 이 문제에 봉착하곤 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세히는 기억이 없지만, 인디아 사상가인 오로빈도(Sri Aurobindo)는 우선 유한자의 논리(logic of the finite)와 무한자의 논리(logic of the infinite)를 구별합니다. 인간과 같은 유한자의 논리에서 볼 때 인격성과 비인격성은 서로 모순될 수밖에 없지만, 무한자의 논리에서 보면 그들은 서로 보완적일 수 있습니다. 즉 궁극적 실재가 진정 유일하게 존재한다면, 그는 인간에게 인격적으로 현현(顯現)할 수도 있고 비인격적으로 현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개종 선언문’에 대하여

“성하님도 말씀하셨듯이, 모든 사람은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 안에서 깨달음을 얻거나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종교로 개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무종교인을 종교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다른 종교인을 우리 종교인으로 만들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우선 성하님과 같은 각기 다른 전통의 종교 지도자들이 다람살라와 같은 곳에 모여서 ‘반개종 선언문’(Declaration of No Conversion)을 채택하는 것이 어떨까요? 물론 어떤 사람이 수많은 고민 끝에 내가 믿고 있는 종교로 개종하겠다고 하면, 우리는 반갑게 그를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그를 나와 동일한 종교인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교는 제국주의적 발상일 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오래 전부터 모든 종교인은 자신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고, 개종은―있을 수는 있으나―슬픈 사실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래서 반개종 선언문의 취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타당하지도 않고 또한 큰 효과도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종교의 중추적 역할은 어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풀뿌리 신도들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대부분의 일반 종교인들이 원한다면 그런 선언문을 채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아직도 전도와 개종을 주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몇 명의 지도자들이 작성한 선언문이 무슨 효력을 발휘하겠습니까?”

“참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제가 종교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티베트 불교의 특성

“일반 불교와 티베트 불교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불교를 소승불교, 대승불교, 티베트 불교로 분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티베트 불교는 소승(小乘)과 대승(大乘)과 우리가 흔히 탄트라라고 부르는 밀승(密乘)의 모든 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뜻에서 티베트 불교는 가장 포괄적인 불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실천에 관한 한 티베트 불교는 소승에 더욱 가깝고, 이론에 관한한 티베트 불교는 대승에 더욱 가깝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티베트 불교는 어느 경우에도 비폭력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래서 오늘날 티베트 불교는 서양의 양식있는 사람들에게 큰 인기가 있습니다.

4. 성하 한국에 대하여 말하다.

성하는 한국불교와 한국인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비확인된 견해에 의하면, 지금까지 다람살라를 방문하는 외국인으로는 대만의 중국인들이 가장 많았으나 그들의 대부분은 중국으로부터 쫓겨난 달라이 라마에 대한 정치적인 제스처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현재 그들의 숫자는 현격하게 감소되었으며, 최근에 이 곳을 방문하는 가장 많은 외국인으로는 단연 한국인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 특별한 관심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만약 성하가 한국을 방문할 수 있다면, 그는 언제든지 모든 예약은 취소하고 내일이라도 당장 떠날 것이라는 말까지 전해지고 있다.

내가 도착한 주간에도 한국과 인디아에 거주하는 한국인 불자를 위한 5일간의 연속 법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이상의 여러 가지 질문 중에서도 특히 한국에 대한 성하의 의견을 묻고 싶었다.

하여간 이번 인터뷰는 달라이 라마 성하가 한국적 상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한 첫 번째 인터뷰가 될 것이다.

(다음의 대화는 문자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어느 부분은 내가 이해한 입장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이제 첫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성하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한반도는 언제 통일이 될까요?”

“하하하, 나는 점쟁이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티베트가 언제 해방될지도 모릅니다. 다만 언젠가는 그 때가 올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신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현재 한국은 이 세상에서 마지막 분단국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북한 국민들은 통일과 평화에 대한 염원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한 남북한 국민의 신념은 바윗돌과 같이 튼튼합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남북한의 정치적 및 문화적 교류에 몰두하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크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통일을 위해 현재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는 전혀 앞길이 막막하게 보이기만 합니다. 예를 들어서 현재 6자 회담이 힘들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성하님은 이 회담이 진정 남북한의 통일에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정도는 기여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비극을 통해서도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서 우리는 세계 제2차 대전을 겪으면서 수많은 비극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이 끝난 다음에 인류가 생존하려면 다시는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결코 그렇게 되지 말기를 바라지만, 만약 6자 회담이 완전히 실패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이며, 그런 뜻에서 북한의 핵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 자체를 거부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한국의 여론은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에 대하여 완전히 양분되어 있습니다. 한 편으로는 한국군의 파견이 이라크 국민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한국인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주장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현재 이라크에 파견된 한국군인들은 미국의 달러를 벌기 위한 용병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느 쪽의 주장이 맞는 것입니까?”

“남북한의 교류와 전쟁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나는 일단 모든 종류의 전쟁을 반대합니다. 평화유지군과 전투병의 구별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국전쟁을 생각해 봅시다. 만약 공산군이 그 전쟁에 승리했다면 한국민은 더욱 엄청난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내가 미국에 가서 이렇게 말하자 어느 젊은 한국인이 소리를 쳤습니다. 한국전쟁에서 이익을 본 것은 미국 뿐이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답변하셨습니까?”

“내가 더 공부를 해야 되겠다고 답변을 했지요, 하하하.”

“한국은 자유 국가니까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더 나아가서 한국전쟁이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별로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나는 모든 종류의 저항을 반대한 톨스토이 사상과 저항을 하되 비폭력으로 해야 된다는 간디 사상의 차이점에 대하여 질문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서 생략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베트남은 무력으로 통일을 했고, 독일은 민주적인 절차를 따라 통일을 했습니다. 무력에 의한 통일은―현재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를 동반합니다. 하여간 북한은 닫힌 사회(closed society)며 독재 국가입니다. 그러나 독재는 오래 가지 않습니다. 북한도 변할 것입니다.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나는 가슴 속으로 다시 눈물을 흘린다.)

“질문의 방향을 돌리겠습니다. 성하님은 일찍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았고, 또한 실제로 과학자들을 초청해서 수많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런 뜻에서 성하님은 한국의 황우석 교수가 진행하고 있는 생명공학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관심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아시다시피 여기에도 두 가지 목소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 목소리는 그가 진행하고 있는 실험이 특히 장애인들에게는 복음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목소리는 그것은 자연 질서를 파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복제인간의 탄생으로 끝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대단히 복잡한 문제지만 나는 일단 생명공학의 위험성이 엄청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황우석 논란의 초기에는 단연 그를 지지하는 편이라서 굉장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건의 전모가 완전히 반전된 일주일 동안 나는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전혀 접할 수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성하의 말씀은 곧 일어날 반전 상황에 대한 예언이었다고 나는 믿고 싶다.)

그 때 시간은 이미 2시간이 지났고 한 쪽에서는 곧 끝내야 된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준비한 자료를 보니 아직 질문조차 하지 않은 것들이 5-6개가 된다.

그러나 이미 예정 시간을 훨씬 넘겼으니 이제 어찌할 것인가. 인연이 닿는다면,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나는 한국인들에 대한 마지막 축복의 메시지를 신청하면서 역사적인 인터뷰는 아쉽게 끝을 맺었다.

“흔히 종교인은 지식과 지성을 전적으로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들의 감정을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먼저 왜 우리가 불행한지를 알아야 하며, 이런 뜻에서 공부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경전 낭송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확고한 지성을 필요로 합니다. 나는 현재 70세가 넘은 늙은이지만 매일 공부를 합니다. 하루도 공부를 하지 않고 지내는 날은 없습니다. 이것이 한국 불교인들에게 보내는 나의 간절한 메시지입니다.”

나는 다시 가슴이 메어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다. 그의 당부는 광신으로 빠지기 쉬운 한국 종교인에게 참으로 적절한 충고가 아닐 수 없으며, 평생 학문에 정진했다고 자부하던 나에게는 나의 나태함을 질타하는 직격탄이 아닐 수 없다.

5. 에필로그: 성하 앞에서 흘린 폭포수 눈물

내가 처음 눈물을 흘린 것은 첫 번째 질문을 하기 직전이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그의 용안을 지척에서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의 눈이 호수같이 맑지 않은가. 나는 그런 눈동자를 평생 본 일이 없다. 이것은 신의 눈동자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때 왜 그런지는 몰라도 나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내가 아직 첫 번째 질문도 하기 전의 일이다.

회견을 진행하면서도 나는 그의 말씀을 들으면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뒤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영어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돋보기를 벗고 여러 번 눈물을 닦고 싶었지만 꾹 참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원래 회견 시간은 60분이었고, 그보다 조금 늦게 끝날 수 있다는 언약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의 인터뷰는 장장 2시간 20여분 동안 진행되었다. 나는 온전히 성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빠져들고 있었다. 가슴 속으로는 계속 눈물을 흘리면서.

이윽고 모든 회견을 끝내고 사진 촬영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성하께서 성큼 나에게 오더니 그 큰 손으로 악수를 하고, 나의 어깨를 껴안으면서 당신의 뺨을 나의 뺨에 부딪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눈물이 폭포수와 같이 떨어지고, 나는 큰 소리를 내면서 통곡을 했다. 분명히 그것은 슬픔 때문도 아니며 지극한 기쁨 때문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평생 한 번도 그렇게 크게 울어 본 적이 없다. 그 순간 나는 ‘영혼의 떨림’을 맛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평소에 티베트 불교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성하는 이른바 인간성과 종교성을 완벽하게 조화시킨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70이 가까운 내가 그 분 앞에서 목을 놓고 통곡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더구나 이 자리는 사석이 아닌 공적 인터뷰가 아닌가. 인간의 영혼과 영혼이 만나면, 이렇게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일도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폭포수 눈물, 그것은 나의 평생에 처음 경험한 눈물이며 아마도 앞으로도 그런 일은 영원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직도 이렇게 펑펑 울 수 있다는 사실은, 내가 달라이 라마 성하를 직접 대면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분 앞에서 흘렸던 폭포수 눈물은 앞으로도 나의 삶을 인도해 줄 것이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영력(靈力)과 같이.


입력시간 : 2006-01-24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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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제27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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