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금융자산 동결 · 대화거부 등 압박… 佛 · 러 등은 하니야 총리 지지

중동은 여전히 화약고인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끄는 새 팔레스타인 자치의회(PLC)가 공식 출범하고 하마스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야(43)가 총리로 지명됐지만 짙은 먹구름은 걷히지 않고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 등 서방 국가들이 무장투쟁 포기, 이스라엘의 존재 인정,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에 체결된 협정 존중 등 기존 노선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하마스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겠다며 ‘하마스 옥죄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수도 라말라의 의회 청사에서 18일 열린 개원 행사도 이스라엘측의 협조 거부로 상당수 의원들이 참석하지 못하는 등 파행을 겪었다.

가자지구 출신 의원들이 요르단강 서안에 위치한 라말라로 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영토를 지나야 하는데 이스라엘측이 이를 허용하지 않아 화상으로 취임선서를 해야 했다.

이스라엘 감옥에 수감된 채 당선된 11명의 의원들도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하마스가 이끄는 팔레스타인의 험난한 가시밭길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미국은 PLC 출범 하루 뒤인 19일 “하마스에 자금을 지원한 의혹이 있는 미국 내 비정부단체의 금융자산을 동결한다”고 밝혀 대 하마스 포문을 열었다.

금융자산이 동결된 단체는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 인근에서 운영되는 비정부단체인 ‘카인드하츠’(Kind Hearts)로 미 재무부는 이 단체가 하마스 산하단체인 ‘홀리랜드 재단’과 연계돼 있다고 주장했다.

미 재무부는 미국 내 모든 금융자산에 대한 동결뿐만 아니라 모든 미국인들과의 거래도 금지했다. 카인드하츠가 하마스 지도자와 협력해왔을 뿐만 아니라 시카고에 본부를 둔 알 카에다 연루 자선단체 ‘글로벌 릴리프 재단’과도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미국은 팔레스타인 정부에 건넸던 500억 달러의 지원금을 되돌려 달라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직접 요청하는 등 바짝 고삐를 죄었다.

이스라엘도 18일 긴급 각료회의를 열어 ‘세금 징수 및 이전 동결’조치에다 가자지구 전면봉쇄를 결정하는 등 하마스 봉쇄작전에 나섰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대신해 징수해 온 매월 5,000만 달러에 이르는 세금과 관세의 이전을 중단하는 내용의 제재조치를 승인했다. 이 제재조치는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 거주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로 출퇴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특히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 대행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테러 당국’(terrorist authority)으로 규정하면서 하마스 정부와 접촉할 뜻이 없음을 천명했다.

중동을 순방 중인 콘돌리사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21일 카이로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하마스는 ‘테러’와 ‘정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라이스 장관은 “테러 진영에 한 발을 두고 다른 한 발을 정치에 들여 놓을 수는 없는 일”이라며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폭력 투쟁을 포기할 것을 하마스에 촉구했다. 유럽연합(EU)도 현재 모든 지원금 지급을 보류 중이다.

이에 따라 만성 재정 적자에 시달려 온 팔레스타인은 하마스 주도의 정부 출범과 함께 정부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의 봉쇄작전이 일각에서 제기한 것처럼 팔레스타인의 재정 파탄을 유도해 ‘정권 뒤집기’에 나선 것인지, 아니면 집권 초반 하마스의 기세를 꺾기 위한 ‘길들이기’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미국이 팔레스타인 원조 중단 발표를 했지만 미 해외원조국(USAID)의 원조 중단이 아직 결정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제재도 새로운 내용이 없으며 이전에 이스라엘이 수시로 해왔던 것이다.

팔레스타인 측도 한 치도 물러나지 않을 태세다.

기존 여당인 파타당 소속 압바스 팔레스타인 수반은 이스라엘의 규제 완화를 호소하면서도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보였고, 총리 지명자인 하니야도 이스라엘의 경제제재 조치에 대해 “결코 이스라엘에 무릎을 꿇지 않겠다”며 단호한 입장이다.

더욱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이스라엘 정부와 맺었던 협정을 준수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마스도 완전히 ‘사면초가’에 직면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패권주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러시아와 프랑스가 하마스에 동조하고 있다.

러시아는 “팔레스타인에 장갑차와 헬기 등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며 일찌감치 하마스 감싸기에 나섰다. 이에 따라 하마스는 3월 초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보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면담키로 했다.

프랑스도 미국과 이스라엘이 하마스 실체를 인정하라고 촉구하면서 원조 협상을 진행 중이다.

도미니크 빌뱅 프랑스 총리는 “서방은 하마스와 평화협상을 해야 한다”고 밝혀 미국의 전략에 딴죽을 걸고 나섰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이 같은 행보는 하마스를 지렛대 삼아 중동에 영향력을 늘리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 형제들도 든든한 후원자들이다. 중동 이슬람주의의 원조이며 지난해 선거에서 이집트의 대표적 야당으로 부상한 무슬림형제단도 나섰다. 형제단은 지지자들에게 수입의 4분의 1을 하마스 지원기금으로 기부하도록 요청했다.

86개국 지부를 통해서도 지원금을 모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 아랍국 외무장관들은 20일 알제리 수도 알제에서 하마스가 주도하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5,000만 달러를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 역시 21일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을 통해 “미국과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선출했다는 이유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벌해서는 안 된다”며 원조 중단을 포기하라고 촉구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이 같은 팔레스타인 압박 작전은 소기의 성과를 거둘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무고한 팔레스타인들에게 소외감을 불러 일으켜 폭력을 유발시킬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스라엘의 유력지 하레츠도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적대적으로 여기는 또 다른 명분을 주는 것”이라며 세금 이체를 중단한 이스라엘 정부를 비판했다.

하마스가 거부하는 이-팔 협정
◇ 오슬로 협정(1993) = 이스라엘, 3차 중동전에서 점령한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의 예리코에서 철수. 팔레스타인 임시자치 허용. PLO를 팔레스타인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 PLO는 이스라엘 존재 인정.

◇ 오슬로Ⅱ 협정(1995) =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을 베들레헴 등 요르단강 서안 7개 주요 도시와 450여 개 소규모 마을로 확대. 96년 1월 자치정부 총선 실시.

◇ 와이리버 협정(1998) = 일명 '땅과 평화의 교환' 협정. 자치정부 헌법에서 이스라엘 적대조항 삭제. 서안지구 13% 를 자치정부에 추가 양도.

◇ 와이리버 Ⅱ 협정(1999) = 이스라엘이 철군을 약속한 서안 13% 중 이미 시행한 2% 외에 11% 지역에서 2000년 1월까지 철수 완료. 가자와 서안 사이의 자유통행 보장. 자치정부는 이스라엘 안전 보장.




권대익 기자 dkw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