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만큼 당대 대중의 취향과 사회 분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예술 장르도 없을 것이다. 1950년대 주부들의 춤바람 문화를 대변했던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만큼이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이름도 성도 모르는 처음 본 남자 품에 얼싸 안겨야 했던' 당대 여성들의 슬픔을 노래한 박신자의 '댄서의 순정'은 그 시절을 증언하는 시대의 명곡이다. 비록 '퇴폐'의 주범으로 몰려 수차례 금지 명찰을 달았지만 말이다.

이제는 한국대중가요의 고전이 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이 1960년대의 대중에게 엄청난 애창된 것 역시 당대 사회의 거대한 흐름이었던 '이촌향도' 현상과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망향 정서를 절절하게 담아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했던 1960년대 10년 동안, 도시인구는 거의 두 배가 늘어났었다.

1982년에 발표된 윤수일의 대표곡 '아파트'는 경쾌한 리듬만큼이나 소재의 신선함이 어필되며 무수하게 리메이크된 시대의 명곡이다. 노래 발표 때까지 도시인의 대표적 거주공간으로 떠오른 아파트를 소재로 삼았던 노래는 대중가요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같은 해에 발표된 김만준의 '아파트 안의 풍경' 정도가 전부였다.

1980년대 도시 거주민들은 아파트가 여기저기에서 솟아오를 때 상대적으로 왜소함과 공허함을 느꼈다. 아파트의 콘크리트 벽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파트에 살다 보면 옆집에 도둑이 들어도 이웃집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도 알 도리가 없다. 그 같은 인간성 상실은 당대 사회에 큰 사회적 문제로 이슈화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다. 제5공화국 군사정권의 철권통치는 사회 분위기를 경직시켜 마음의 문을 더욱 단단히 걸어 잠그는 불신 풍조를 만연시켰다.

윤수일은 미8군 록밴드 '골든 그레입스'의 기타리스트로 음악생활을 시작해 1977년 안타 프로덕션의 안치행이 기획한 록밴드 '윤수일과 솜사탕'의 리드보컬로 빅히트곡 '사랑만은 않겠어요'로 존재를 알렸다. 이후 솔로 가수로 독립한 그는 '꿈이었나봐', '갈대', '토요일밤', '추억', '유랑자', '그대와 함께 춤을', '나나' 등을 연속 히트시키며 1980년대 최고의 인기가수로 군림했다.

이국적으로 잘 생긴 용모, 고독하고 우수에 찬 이미지 또한 그의 인기 상승에 큰 요인으로 작용했었다. 하지만 폭넓은 대중에게 각광받은 인기가수의 이미지는 시대의 명곡들과 록 필이 충만한 앨범을 발표한 싱어송라이터인 그를 뮤지션으로서는 정당한 평가나 대접을 받는 데 걸림돌로 작용한 측면이 있다.

1981년 '떠나지마'를 타이틀로 한 윤수일 밴드의 첫 앨범은 당시 대세를 이뤘던 '뽕필' 가득한 음악 역행적 트렌드 음악이 아닌 터프한 하드 록과 느린 템포의 록 발라드로 무장해 향후 그의 음악적 행보에 기대감을 안겨준 수작이다. 특히 경쾌한 리듬이 절로 어깨를 들썩이게 했던 '제2의 고향'은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살았던 수많은 시골 출신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메시지 또한 탁월했다. 1982년 발표된 윤수일 밴드의 2집은 그 같은 자신의 음악적 지향점이 빛을 발하며 폭넓은 대중과 소통했던 대표작으로 손색이 없다.

음반 발표 당시 타이틀 곡 '아파트'는 단독주택보다 아파트가 주거공간으로 선호도가 급등했던 대중적 기호와 맞물려 각종 노래자랑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로 선정되기도 했다. 당시 지상파 인기순위 프로그램인 KBS TV의 '가요 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기록한 것은 그 결과물이고 이후 스포츠 경기장의 단골 응원가로 자리 잡으며 국민가요로까지 급부상하는 파급 효과를 획득했다.

록 필로 무장해 다시 녹음한 1집 수록곡 '제2의 고향'과 솔로 시절의 히트곡 '유랑자'는 '아파트'와 더불어 도시3부작이라 할 만 했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이 노래들은 아파트가 주거형태로 각광받으며 도시인구가 전체 인구의 과반수가 넘어섰던 시절의 정서를 적절하게 그려낸 새로운 '시티 뮤직'으로 평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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