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기를 잘 했구나…저렇게 새로운 시간이 산더미로 밀려오고 있으니…"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는 정약전은 먼 바다를 보며 혼자 말을 던진다.

'난바다에서는 새들은 날지 않는다. 바다는 다만 하늘과 닿은 물일 뿐이었는데, 흔들리는 물 위에 햇빛이 내려 앉아서 바다에서는 새로운 시간의 가루들이 물 위에서 반짝이며 피어 올랐다. 천주가 실재한다면 아마도 저와 같은 모습일 것인가를 정약전은 생각했다.'

작가 김훈이 '남한산성'에서 4년 만에 '섬'으로 나왔다. 장편 역사소설 '흑산(黑山)'을 출간했다. 지난 4월 경기도 안산시 선감도에 들어가 5개월 동안 칩거하며 연필로 한 자 한 자 써내려 간 글을 원고지 1,135매 분량으로 탈고했다.

소설 '흑산'은 천주교리를 공부했지만 단호하지 못했던 정약전과 조카 사위 황사영의 이야기가 큰 줄기다. 여기에 조정과 양반 지식인, 중인, 하급 관원, 마부, 어부, 노비 등 각 계층의 생생한 인물들이 또 다른 줄기를 만들며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조선 사회를 그려 나간다.

정약현, 약전, 약종, 약용 4형제와 장자인 약현의 사위 황사영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서양 문물과 함께 들어온 천주학을 받아 들인다. 결국 '사학 죄인'으로 몰린 정약전, 약종, 약용 3형제는 의금부 장판 위에서 헤어진다. 약종의 순교는 형제들의 죽음을 면해 주었다.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고, 약용은 서슴지 않고 배교한 뒤 조카 사위 황사영까지 밀고한다.

'웃으면서 목이 잘린 동생 정약종의 죽음은 몇 달 전의 일이었지만, 전생의 꿈처럼 멀어졌고멀수록 더욱 선명했다. 한 때의 황홀했던 생각들을 버리고, 남을 끌어들여서 보존한 나의 목숨으로 이 세속의 땅 위에서 좀더 머무는 것은 천주을 배반하는 것인가. 어째서 배반으로서만 삶은 가능한 것인가. 죽은 약종이 말했듯이 나에게는 애초에 믿음이 없었으니 배반도 없는 것인가. 그런가, 아닌가.'

정약전은 약종의 죽음을 이렇게 회고한다.

작가는 후기에 '새로운 삶을 증언하면서 죽임을 당한 자들이나 돌아서서 현세의 자리로 돌아온 자들이나, 누구도 삶을 단념할 수는 없다'며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소망에 대하여 말하려 했다'고 쓰고 있다.

작가는 소설 '흑산'을 집필하면서 직접 바다 위를 나는 새를 연필로 그렸다. 황포 돛을 단 듯한 날개와 사람의 다리를 지닌 듯한 새가 육지와 섬 사이의 바다 위를 날고 있다. 번민 속에서 물고기를 보고 살다 간 정약전의 모습일까.

2007년 병자호란의 참담한 역사를 다룬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또 다른 섬 '흑산'으로 가고 있다. 학고재, 1만3800원



이창호기자 chang@sp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