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도시는 물론, 시골까지도 온통 아파트 천지다. 아파트는 더 이상 선망의 주거 공간은 아니란 이야기다. 하지만 윤수일이 '아파트'를 발표했던 1982년은 1975년부터 시작된 서울 강남의 개발과 함께 아파트가 새로운 주거 공간으로 각광받았던 시기다.

그때나 지금이나 회색빛 시멘트로 대변되는 아파트의 이미지는 황량하다. 단절된 아파트의 벽과 벽 사이에 외롭게 서있는 것 같았던 윤수일. 그는 태생적으로 '아무도 없는 쓸쓸하고 낯선 도시'를 방황하는 유랑자였을지도 모른다. 혼혈가수 윤수일이 느꼈을 도시인의 고독과 외로움은 비단 그 혼자만의 전유물이었을까? 아파트가 주거 공간으로 각광받으면서 '인간성 상실'은 거대 담론으로 회자되며 인간성 회복에 대한 우려감이 증폭했었다.

윤수일의 '아파트' 가사에는 온기보다는 쓸쓸한 정서로 가득하다. '아파트 시대'에 등장한 노래 '아파트'는 그 시절의 정서를 대변하는 주제가였다. 당시 노래의 빅히트로 인해 윤수일은 아파트 분양 현장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한 건설회사가 아파트 분양을 받는 모델하우스에 인기 절정의 그를 초청해 분위기를 돋웠던 것이다.

'아파트'의 인기 비결은 단순히 아파트 붐의 영향력이 아닌 가사 속에 담긴 의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성냥갑처럼 답답한 공간인 아파트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 말이다.

윤수일의 '아파트'를 지배하는 폐쇄와 단절의 정서는 가진 자와 없는 자, 잘난 자와 못난 자의 차별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양극으로만 치닫는 사회 구조적 모순에 대한 불안과 불만의 거대한 공감대는 이 노래가 히트한 숨은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혼혈아 윤수일은 성장 과정을 통해 극도의 소외감과 고독감을 겪었다. '제2의 고향', '갈대', '도시의 천사', '유랑자' 같은 그의 히트곡들은 그의 성장 과정에서 겪은 삭막함의 정서를 담고 있다. 스스로 자신의 노래를 '시티 뮤직'이라 명명한 것은 '전원의 흙을 밟아 보지 못하고 아스팔트 위에서 사는 세대들을 위한 음악'이란 뜻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성 회복을 위해 윤수일은 자신의 노래가 조금이라도 정서적 작용을 일으키길 원했던 것 같다.

명곡 '아파트'가 수록된 윤수일 밴드 2집은 음악적으로 완벽한 구성은 아니다. 1면은 에너지 넘치는 하드록 사운드과 시대의 정서를 대변하는 창작곡들로 꾸며졌지만 2면은 솔로 시절의 히트곡들을 메들리 형식과 베스트 음반 스타일로 구성했다. 수록곡 부족과 제작사의 상업적 포석 중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앨범의 완성도에 저해 요인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명곡 '아파트'는 물론이고 날라 다니는 듯 휘몰아치는 오르간 사운드가 인상적인 '토요일 밤', '돌아와', '불빛'등 도시의 풍경을 세밀하게 스케치한 탁월한 록 넘버들은 향후 그의 음악적 행보에 힘을 실어주기에 충분했다.

1982년 모든 가요 차트를 점령한 윤수일의 창작곡 '아파트'는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가사 중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 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 부분에서고 '다리'와 '갈대 숲'이 여성의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기발한 상상 말이다.

그렇다면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아파트'는 또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이는 감동을 안겨주는 예술적 장르로 인식의 변화가 이뤄진 지금의 대중과는 달리 대중가요를 폄하했던 시기의 대중이 품었던 몰이해와 저급한 수준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윤수일은 MBC의 한 PD와의 불화로 1985년까지 출연이 정지되며 잠시 주춤거렸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아파트'의 노래 파급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1980년대의 윤수일은 창작과 인기에 있어 조용필과 결 줄만했다. 검은 선글라스에 가죽옷을 걸치고 다리를 흔들며 노래한 그의 모습은 엔터테이너의 전형으로 각인되어있다. 록 사운드에 뿌리를 둔 그의 노래는 그 같은 이미지로 인해 음악적으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주류 음악계에 록 음악 선풍을 일으키며 록 전성시대 만개에 일조했던 그는 인기가수가 아닌 록 뮤지션으로 재평가 받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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