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차식은 3남1녀 중 막내로 부산에서 태어났다. '차식'이란 이름에서 느껴지듯 그는 쌍둥이다. 쌍둥이 형 이름은 '쌍식'이다. 이름 때문에 팔자가 셀 것을 걱정해 그의 집에선 형을 '성준', 그를 '성찬'으로 부른다. 소시 적, 그의 아버님은 동네 약장수를 따라 다니며 기타와 아코디언 연주하는 방랑생활을 했었다. 35살이 된 그가 노래방에서 처음 들은 아버지의 노래는 너무도 감성적이었고 어머니는 고운 미성이었다고 한다.

가난으로 입양갈 뻔해

그는 유년시절을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결사반대로 무산되었지만 네덜란드로 입양갈 뻔 했던, 가난이 안겨준 아픈 기억 때문이다. 할머니 집에서 4살 많은 누나 등에 업혀 성장한 그는 초등학교 시절에도 과제를 준비 못해 늘 벌을 섰던 아이였다. 하지만 중학교 미술시간에 그의 데생 터치를 본 선생님의 칭찬에 예고 진학을 꿈꿨지만 그 또한 궁핍한 집안형편 때문에 포기했다. 고등학교 때 가출한 쌍둥이 형을 찾아다니며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처음 본 그 역시 공부보다는 수업시간에 시를 쓰고 의상디자인을 그리고 오토바이를 타고 놀러 다녔던 문제아로 변해갔다. 이처럼 그의 유년과 청소년시절은 좌절과 모든 걸 참아야 했던 온통 우울한 잿빛으로 채색된 고통의 시간이었다.

불량학생(?)이었던 그는 고2 때 친구들에게 생일선물을 강요했다. 그때 <시인과 촌장>의 '숲' 음반을 받았다. 붉은 노을이 지기 시작한 무렵, 집에서 '가시나무'를 들으면서 눈물이 터져버렸다. 조용필, 이용 같은 당대 인기가수들의 노래만 알았던 그는 '음악이 사람을 울릴 수도 있다'것을 처음 경험했다. 이후 동아기획 음반들과 레드 제플린, 딥퍼블 등 외국 고전 록 음반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졸라 건반을 마련한 그는 입에서 나오는 멜로디를 오선지에 그려 넣는 형식으로 노래를 만들기 시작해 첫 창작곡 '마지막 콘서트2'를 쓰기도 했다. 내친김에 4인조 밴드 <팝콘>을 결성해 부산 광안리 SAY소극장에서 공연을 열어 제법 굉장한 반응을 이끌어내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중노동에도 음악 있어 행복

고교 졸업 후 막 사업을 시작한 아버지의 작은 공장에서 25살까지 유일한 노동자로 일했다. 1993년쯤 <너바나>의 음악을 접한 후 꿈틀거리는 음악적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다시 밴드결성을 결심했다. 그때 록밴드 <레이니선>과 솔로 앨범에 참여한 고교 2년 후배 기타리스트 김태진을 만났다. 공장 탈의실에서 가라오케 반주기를 구해 합주를 시작했을 때 정차식은 베이스를 연주했지만 마구잡이 실력이라 보컬로 떠밀렸다. 이후 방위산업체에서 40개월 동안 박봉과 하루 14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렸지만 정차식은 "그래도 음악이 있어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웃는다. 1997년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록큰롤 코리아 페스티발'에 부산대표로 출전했다. '귀신이 곡하는 창법'이라는 '귀곡 메탈'이란 평가를 얻으며 이슈가 되자 음반제작자가 나타났다. 1998년 그가 리드보컬로 참여한 밴드 <레이니선>의 첫 앨범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고 1만장이 넘게 팔려나갔다.

2000년 서태지의 컴백 콘서트에 초대받으면서 인지도는 급상승했다. 그때 서태지 레이블 괴수대백과사전과 전속 이야기가 오가자 매니저와 오해가 생겨 상처를 입었다. 음악을 그만둘 생각에 2002년 러시아, 중앙아시아를 거쳐 몽골까지 5개월 정도의 장기 배낭여행을 훌쩍 떠났다. 여행길에서 들은 비트와 우울함이 깊이 배여 있는 피아졸라의 탱고 음악은 깊은 감명을 안겼다. 그가 탱고에 열광하고 있는 이유다.

귀국 후 찾아온 매니저가 2장의 음반제작을 약속한 계약서를 내밀었다. 2003년 '소가 도살장에 끌어가는 심정'으로 제작한 레이니선의 3집 이 세상에 나왔다. 이전과 확연하게 변화된 음악을 담아 상업적으론 실패했지만 정차식 솔로음악의 원형질을 경험할 수 있다.

2009년 4집 이후 영화와 드라마 음악을 작곡하며 생계형 뮤지션으로 살았던 그는 2010년 인디레이블 Capsule Roman을 설립해 <텐고>라는 이름으로 첫 솔로 음반을 냈다. 그리고 2011년 아무 기대감이 없이 정규1집 <황망한 사내>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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