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회상하는 공간인 간이역에 시가 더해지면, 역은 다시 문화가 된다. <시가 있는 간이역>에서 시인 설태수가 노래한 중앙선 구둔역 모습. 600개가 넘는 우리나라 기차역 가운데 시의 배경으로, 여행의 소재로 한 번이라도 전문 시인의 시 작품에 등장하는 역은 150개쯤 된다. 일곱 해 가까운 세월 동안 <시가 있는 간이역>의 저자는 이들 시를 좇아 역을 찾았다. 꼭 산간 오지의 간이역이 아니더라도, 도심 한가운데 번듯이 자리잡은 역사도 빛 바랜 추억과 함께하면 마음 속 간이역이 되었다. 그는 시의 언어를 덮어 쓴 역을 다시금 평면적인 산문으로 조립하여 한 걸음 독자에게 친근히 다가가게 해본다는 의도에서 책을 펴냈다고 한다.
지상의 모든 역들이 문화가 될 수 있겠다는 희망도 그 작업 가운데서 더 굳건히 했다. 역은 '떠나 옴'과 '떠나 감'의 지정학적 좌표다. '가고 옴'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떠남'의 동질성은 불변이다. 떠남은 공간의 이동, 관계의 유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움직이지 않았는데 상대가 변하는 것 또한 떠남의 양태가 된다.
이런 떠남의 형식 가운데 시간만큼 야멸찬 것은 없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이윽고 모든 것을 무화시킨다. 근근이 우리의 기억이, 흘러 가 버린 것, 변해 버린 것을 환원 혹은 복원시켜보려고 시간의 통로 속에서 안간힘을 쓰지만 부질없는 경우가 훨씬 많다.
역이 이런 안쓰러운 회억과 그 부질없음을 확인하는 공간으로 대체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주안역은 인천광역시의 도심 역 중 하나이지만 시인의 회상과 과거 반추의 상관성으로 볼라치면 강원도 바닷가건 충청도 산골에 있건 별반 차이가 없다.
이 책은 고산자(古山子)의 고행처럼, 중앙선 간현역부터 경부선 황간역까지 온몸으로 누비며 쓴 역과 시의 '대동여지도'라 할 만하다.
최학 지음. 서정시학. 1만3,000원.
홍성필기자 sphong@sp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