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대중가요들은 '공감대를 형성할 메시지가 없다'는 비난을 종종 받는다. 실제로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는 의태어와 의성어가 난무하고 노래보다는 춤에 비중을 둔 감각적이고 반복적인 사운드 일색의 노래가 대부분이다. 이는 고단한 대중의 삶을 위로하고 '이건 딱 내 노래'라고 공감할 진정성을 담은 노래보다 상업적 성과에만 치중된 소모적인 음악환경이 빚어낸 참담한 결과다. 젊은 세대의 음악소비 패턴의 변화는 히트곡은 넘쳐나지만 모든 세대가 공감하는 명곡이 없는 이상한 세상을 만들었다.

음반을 소장하던 시대에서 음원을 소비하는 시대가 되면서 디지털음원이 세상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다. 과거 아날로그 시절엔 노래가 히트하기까지 짧아도 몇 달, 길게는 3년 이상이 걸리기도 했다. 요즘은 노래가 발표되면 즉각적으로 각종 음원 차트를 올킬하는 초스피드 시대다. 각종 인기가요 차트를 보면 신곡의 생명력이 일주일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빨리 뜨거워진 냄비는 빨리 식는다'는 속설처럼 음원을 공개한 그날부터 모든 차트를 점령하며 화제의 중심에 오른 빅 히트곡의 라이프 사이클이 1∼2달이면 소멸하는 것이 디지털 세상에 발표된 노래들의 슬픈 운명이다.

허스키 음색+애절한 가사

그런 점에서 호소력 짙은 허스키 음색과 애절한 가사로 사랑받았던 김수희(본명 김희수)의 대표곡 '애모'의 히트과정은 시사적이다. 세대 초월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이 노래는 발표 즉시 반응을 이끌어낸 히트곡은 절대 아니다. 1990년 발표된 '애모'는 3년이 지나서야 애틋한 가사말의 사연이 대중에게 소개가 된 후 열풍을 일으켰던 아날로그 시대의 전형적인 슬로우 히트곡이다. 1993년 4월 대성음반 사무실에서 유영건 문예부장과 한 대중음악 담당기자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때 유영건은 수북하게 쌓인 CD더미 속에서 김수희 7집 <서울여자>를 꺼내 기자에게 건넸다. 앨범의 타이틀도 아니고 히트조차 되지 못하고 사장된 자신의 창작곡 '애모'를 소개하고 싶었던 것.

오랫동안 사귀던 연인과 이별과 재회를 반복한 애틋한 유영건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인생의 노래를 들어본 기자는 김수희의 허스키한 음색에 담긴 애절한 노래 가사가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지금은 사정이 조금 나아졌지만 당시 대중음악계에는 나쁜 관행이 존재했었다. 신문, 방송의 대중음악 담당자들은 음반에 수록된 전곡을 들어보지 않고 음반사에서 미는 곡으로 표시한 타이틀곡만을 기계적으로 방송하고 다뤘다. 뒤늦게 노래에 담긴 애절한 사연이 지면을 통해 전해지자 각 라디오방송에서 '애모'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방송사에 문의전화가 쇄도하고 레코드 가게에도 찾는 이가 급증했다.

1993년 대중음악상 '올킬'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중음악계를 점령했던 1993년 대중가요계의 화두는 놀랍게도 김수희의 '애모'였다. 그때 이 노래가 전성기의 서태지와 신승훈, 김건모와 차트 정상을 다퉜던 최강의 경쟁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대중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김수희의 '애모는 1993년 가장 많이 방송된 노래' 1위는 물론 갤럽에서 조사한 '가장 좋아하는 가수와 노래' 부문에서도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또한 KBS 가요대상 대상, MBC 10대 가수 대상, 제 4회 서울가요대상 본상, 가요 톱10 골든컵, 한국 노랫말 대상, 올해의 스타상 가수부문 우수상 등 그해 모든 중요 대중음악상을 그야말로 올킬했다. MBC 대학가요제 경연을 앞두고 조사된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트로트가요에서도 1위로 선정되었다.

김수희에게 가수, 제작자, 작가로서 인생을 만개를 시켜준 '애모'의 여파는 가수 임주리로 이어졌다. 발표한 지 7년이 넘었던 '립스틱 짙게 바르고'가 연속해 늦깎이 히트가 터트렸던 것. 이에 자극받은 대중음악계는 1994년부터 리바이벌, 리메이크 붐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발표 당시에 외면당했더라도 '좋은 노래는 세월이 흘러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명곡의 사례다. '애모'의 성공은 창작자 유영건에게도 경제적 안정을 가져주며 결혼에 골인시키는 인생전환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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