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노래의 한 대목이나 한두 마디 전주만 듣고도 기억의 단층 속에 이미지의 화석처럼 보존되었다 되살아나는 경우는 무수하다. 이처럼 지워지지 않는 기억 속에 잔재하는 음악의 마술이란 메커니즘을 역이용한 대표적인 예로 군가나 애국가, 건전가요, 운동가요를 들 수 있다. 음악방송 선곡 담당자들이 달력과 날씨에 민감한 것도 비슷한 이유다.

통기타와 생맥주, 청바지로 대변되는 70년대 청춘들에게 포크송의 존재는 각별하다. 통기타 하나가 있어도 교정과 거리 그리고 전국의 산하에서 자연스럽게 합창이 울려 퍼졌다. 포크송은 군사정권에 의해 통제되고 기성세대들에 의해 억눌린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저항적 통로로 시대적 역할을 다했다. 시대가 혼탁해질수록 답답한 일상을 자신들만의 순수한 어법으로 표현한 담백하고 아름다운 통기타 가락에 그 시절 청년들은 열광했었다.

퇴폐하고 반사회적이라는 이유로 가해진 군사정권의 강압적 금지조치는 오히려 주옥같은 명품 포크송들을 무수하게 탄생시키는 이율배반적 결과를 불러왔다. 그 결과, 사회적 공기가 혼탁했던 1970년대에 발표된 포크송들은 순백의 결정체 같았다. 포크송은 세상이 어둡고 혼탁해 질수록 마치 누가 더 맑고 순수한지를 경쟁하는 듯 울려 퍼졌다. 바로 그 시기에 등장했던 여성듀엣 <산이슬>의 '이사 가던 날'과 '밤비야'는 암흑의 시대에 순수를 갈망했던 젊은 영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명품 포크송들이다.

1973년 결성된 <산이슬>은 인천 출신의 중고등학교 동창생인 주정이, 박경애로 구성된 걸그룹이다. 인천여상시절 합창단으로 활동한 두 사람은 장부정리 공부보다 노래를 훨씬 좋아했고 잘 불러 전국노래자랑에 나가 월 장원에 뽑혀 연말대회까지 진출했었다. 본격적인 가수활동은 여고졸업 후 지구레코드와 월간 팝송이 공동주최한 포크싱어선발대회에서 최우수그룹상을 수상하면서 시작되었다. 1974년 번안 곡 '마지막 남은 것'으로 공식 데뷔한 이후 3년 간 몇 장의 앨범을 통해 발표한 그들의 주옥같은 포크 명곡들은 밝고 신선했다.

박경애·주정이 '환상화음'

비록 외국 번안가요들로 채워졌지만 두 여성 멤버의 캐리커쳐 이미지가 인상적인 이들의 데뷔앨범에는 멤버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심지어 주소까지 명기되어 있다. 무모하리만치 순수하고 순박했던 시절을 증언하는 흔적이다. 팀 이름 <산이슬>은 팝 칼럼니스트 이양일이 '음색이 맑고 곱다'고 지어주었다.

12곡이 수록된 첫 독집 <고운노래모음>은 1976년에 발매되었다. 당대 청년세대의 일상 이야기들을 스케치한 서정적이고 경쾌한 노래들은 매력적인 허스키 음색의 박경애와 밝고 부드러운 음색이었던 주정이의 목소리가 합체되어 환상적인 화음을 구현했다. 앨범 수록곡 중 최대 히트곡인 '이사 가던 날'은 이농과 산업화의 폭력적인 물살에 저항하는 강력한 감성의 힘을 발휘하며 청소년층에 어필했던 명곡이다.

또 다른 빅 히트곡 '밤비야'는 물론이고 '두마음', '혼자 걷는 길'등 이들의 들려준 맑고 경쾌한 노래들은 젊은 층에 뜨겁게 소비되며 전국 팔도 대학 축제에 초대를 받으며 섭외 1순위 걸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음반 발매 직후 다른 사진으로 대체된 재발매 음반이 발표되고 최근에도 CD로 이 음반이 재발매된 것은 <산이슬> 노래에 대한 대중의 시대초월적인 애정을 증명한다. 1977년 동양방송에서 중창단상을 타면서, 이들은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지만 두 여가수는 각각 솔로가수로 독립했다.

대학축제 '섭외 1순위'

박경애는 '곡예사의 첫사랑'으로 10대 가수 반열에 오르며 80년대를 풍미했지만 몇 해 전 폐암으로 사망했다. 체구가 컸던 박경애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고 귀여운 외모로 남성 팬들에게 사랑받았던 주정이는 1980년대를 에로물전성시대로 채색한 영화 <애마부인>의 주제가 '서글픈 사랑'을 빅히트시킨 히로인이다. 맑고 고운 포크송 가수에서 농염하고 끈적거리는 성인가요 가수로 변신한 <산이슬> 멤버들의 음악적 변신은 70년대와 80년대 한국대중음악의 질감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표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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