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승 / 박서강 기자
그의 드럼은 '이야기' 한다. 드럼 하면 록이다, 메탈이다 해서 엄청난 출력으로 공연장을 결딴내 버릴 듯한 광경을 얼른 떠올리게 되지만, 그것은 그만큼 우리의 미적 감각이 무뎌 질대로 무뎌져 있다는 증거밖에 되지 못 한다. 드럼도 우리의 사물(북, 징, 장구, 꽝과리)처럼 얼마든 섬세해 질 수 있는 악기다.

"나는 템포 속에서 숨 쉰다. 템포 속에서 느렸다 빨랐다 할 수 있다."드러머 안기승(55)의 드럼은 함께 연주하는 사람들을 배려한다. 악기든, 목소리든 연주자의 언어를 알아 듣는다. 예를 들어 가수 이미자씨는 그의 드럼 연주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단언하듯 말했다. 강태환 선생과 한번의 조우에서 체득한 연주 방식 때문이다. 왜냐? 프리 제즈의 템포와 리듬감을 체감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일생에서 그 때 단 한 번뿐이니까." 그러나 만남이라 하기에는 뭣한, 스침이라 해야 더 어울릴 법하다.

그는 대중 음악 드러머로는 희귀한 유학파다. 프랑스에서 드럼을 공부하고 귀국, 실력파로 이름이 오르내리던 것이 1995년 초였다. "명지대 부근에 있던 내 연습실로 느닷없이 찾아왔었죠." 조그마한 장바구니에는 알토 색소폰이 담겨져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무슨 곡을 할지 말도 않고는 다짜고짜 '같이 한번 맞춰 보자'며 방석을 펼치고 가부좌를 틀더니 알토 색소폰을 불었다. "프리 재즈는 보통 한 곡에 10분 정도 잡아야 한다. 내가 악기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어야 한다"더니 '연주'는 시작됐다. "그 소리를 들으며 즉각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반응하는 게 저한테 주어진 일이었죠. 바람이 불면 자연스럽게 물체가 소리 내듯 하라는 거였어요." 안씨에게는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며칠 지나서 편지가 왔다. "연주자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마음이 읽혔어요." '첫 프리 재즈일 텐데 만족스러운 건 아니지만 당신의 패턴이 만들어질 것 같다, 계속 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다'는 요지를 아직도 그는 잊지 않고 있다. "지금 생각하니 그갈수록 생생해지는 첫만남이지만 당시는 그 의미를 전혀 몰랐죠."그러나 그 뜻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강씨의 청파동 자택 지하실을 찾아 갔지만 유학 비용 마련하느라 돈벌이에 나서야 했던 처지였던 지라 더 이상 깊은 만남은 이뤄질 수 없었던 터였다. "까마득 잊고 있었다 싶은 프리 재즈의 기억이 20년이 다 지나 가는 요즘 더 새록새록해 지는 걸 느껴요."

그는 A급 대중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부대낀 드러머다. '사랑과 평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밴드 멤버였다면 최상급의 실력파다. KBS경음악단, MBC관현악단 등 이후의 경력도 그 같은 사실과 운을 맞춘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 원체험을 규정하는 것은 재즈다.

미 8군에서 재즈 드러머로 활동한 부친(안명훈)의 영향으로 그는 9세부터 미 8군 쇼 무대에 섰다. 물론 당시는 트위스트 같은 유행 음악이었다. 김대환, 허영욱, 조상국 등 세 드러머가 재즈 드럼의 판도를 가름하고 있던 당시, 허영욱을 사사한 그는 해군 군악대에서 미국의 빅밴드 악보 그대로 공부했다. 정통의 길이었다.

그러나 한번 접어든 드럼의 길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자식이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92년 그는 파리의 생브리스 콩세르바트와에 입학했다. 학위증 받아야 인정해주는 풍토가 한몫했다. 보다 내면적으로는 타악 공부라면 팀파니나 마림바 등 클래식 악기만 쳐주던 분위기 속에서 "평생 노래 반주만 해주다 끝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더 컸다. 보다 높은 음악에 대한 갈망이었다.

가끔 참가하는 해외 재즈 페스티벌은 그의 존재 확인이다. 천년동안도, Once In A Blue Moon, 야누스 등 재즈 클럽에 비정기적으로(두세 달에 한번꼴) 무대에 오르며 김수열 등 1세대 뮤지션들과 트리오, 콰르텟 형식으로 계속 하는 재즈는 그 알리바이다. "대개 이름 없이 해요. 이름 걸기도 쑥스러워…."

강씨와 단 한번 협연 해 봤을 뿐인 그의 예술적ㆍ미학적 자존감은 실은 매우 강하다."그런 분이 한국에 한 분이라도 계신다는 것, 문화 선진국에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자부심의 근거다. 진정한 예술적ㆍ영적인 가치가 천대 받고, 실력도 없는 사람이 돈 벌고 대접 받는 현실이 아쉬울 뿐이다." 한국에는 기준이 없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만일 강태환씨와 다시 할 기회 온다면? "자신 있게 할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영적인 세계에 빠지고픈 마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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