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현과 펄시스터즈가 합작해 꽃피운 소울, 사이키로 대변되는 <신중현 사운드>로 인해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던 1969년. 데뷔 1년 만에 가수왕에 등극한 펄자매가 전속사를 옮기며 결별을 선언했다.

이에 신중현은 가창력과 품격 있는 무대매너로 정평이 난 김상희를 픽업해 사이키델릭 여성 로커로 변신시키는 대모험을 단행했다.

몇 개월 동안 신중현으로부터 사이키델릭 창법을 사사받은 김상희는 서울 명동에서 열린 신중현 사이키델릭 리사이틀 무대에서 현란한 사이키 조명아래 신곡 <어떻게 해>를 선보였다.

기존 이미지와 전혀 다른 창법으로 소울 사이키 가요를 부르는 예상치 못한 김상희의 변신에 관객들의 반응은 ‘펄시스터즈의 모방’이라는 혹평과 ‘결혼 후 오히려 가수 연령을 5년이나 젊게 해준 성공적인 이미지 변신’이라는 찬사로 엇갈렸다.

이때부터 라이벌 관계가 형성된 김상희와 펄시스터즈는 국내 사이키델릭 여왕자리를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신경전을 펼쳤다.

1969년 10월 시민회관에서 열렸던 신중현 리사이틀 쇼에서 결국 사고가 터졌다. 늦게 도착한 김상희로 인해 펄시스터즈와 출연 순서로 다투는 과정에 욕설과 삿대질이 오간 감정싸움으로 번져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둘 사이의 충돌 사건은 진상조사단까지 구성되는 물의를 빚기도 했다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른 김상희는 1970년 1월 첫 사이키델릭 리사이틀을 개최했다. 이때의 공연실황을 담은 <김상희 리싸이틀쇼> 음반은 기록에 취약한 대중음악계에 소중한 공연 자료이고 척박한 김상희의 최고 명반으로 손꼽힌다.

코미디언 배삼룡이 사회를 맡고 신중현과 퀘션스와 여대영악단이 세션을 맡았다. 이 실황음반의 백미는 2면에 수록된 사이키델릭 향기가 진동하는 7분50초짜리 신중현의 명곡 ‘어떻게 해’. <퀘션스>의 신들린 애드립 연주는 듣는 이의 탄성을 불러낼 만큼 현란했다. 특히 록 버전으로 들어보는 김상희의 히트곡 <울산 큰 애기>도 놓칠 수 없는 특별한 트랙이다.

기성세대를 대상으로 활동했던 김상희는 김상희는 무교동의 코파카바나 클럽무대와 조선호텔 나이트클럽으로 진출하며 젊은 남성층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호사다마라 할까. 뜨거운 화제 속에 히트퍼레이드를 벌이던 ‘어떻게 해’가 ‘단벌신사’에 이어 금지의 수난을 당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제목과 가사를 ‘누워서 해’등 선정적인 내용으로 개사를 해 부르는 짓궂은 남성들이 문제였다. 저속하게 개사된 노래가 더욱 파급력을 발휘하면서 ‘창법저속’이란 이유로 방송금지처분이 내려졌다. 김상희의 사이키델릭 음악 모험은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국제적인 가수로 거듭나려는 시도를 이어갔다. 그해 김상희는 패티김과 함께 '일본 EXPO 70'의 한국행사 ‘동경 아리랑페스티발’에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로 한 달 간 참여했다. 이때 관심을 보여 온 일본의 케논 음반사를 통해 여러 장 음반을 발매했다.

이때 야마하음악제에서 영어로 노래하는 김상희를 눈여겨본 미MGM사와 음반계약 체결을 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 세계적인 트럼펫 주자 히노데루 마사와 합동콘서트는 물론 홍콩, 태국 등 동남아순회공연까지 개최하며 국제적인 가수로 명성을 쌓아나갔다. 성음사의 수출용음반은 김상희가 당시 팝송 곡으로 세계진출을 모색했던 시기였음을 증명해주는 음반들이다.

1971년 사이키델릭에서 다시 웨스턴 컨트리풍 장르로 복귀한 김상희는 국내최초의 전속6인조 개인 전속악단 <김상희와 그녀의 악단>을 조직해 국내는 물론 미국, 일본, 홍콩 등 해외공연을 성사시켰다. 1972년 문정선이 가곡 ‘보리밭’으로 빅히트를 터트리자 가요계에 가곡음반 발매열풍이 불어 닥쳤다. 조영남, 은희와 더불어 김상희도 가곡에 도전했다.

1973년 제1회 한국방송가요대상 여자가수 수상에 이어 1976년엔 ‘즐거운 아리랑’으로 동경가요제 특별상을 수상하며 김상희는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TV와 라디오 진행자로 거듭난 김상희는 80년대에 들면서 남편의 정치적 탄압과 함께 방송활동을 잠시 중단했지만 지금까지도 신보를 발표하며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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