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안에 헬레니즘시대부터 고딕·르네상스·바로크 까지 '공존'해안길 발칸반도 최고 드라이브코스 저녁엔 노천바 불 밝히는 낭만 포구

트로기르 해안풍경
뜨로기르는 아드리아해의 순풍이 닿는 크로아티아의 작은 섬마을이다. 붉은 지붕에 중세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낸 섬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뜨로기르는 해변 산책로에 야자수들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저녁이면 노천바가 불을 밝히는 낭만의 포구이기도 하다.

뜨로기르로 가는 길부터가 운치 넘친다. 크로아티아 제2도시인 스플리트에서는 1시간 거리. 해변을 달리는 버스에는 차장이 동승하는데 나이 지긋한 아저씨다. 조그마한 기계를 들고 즉석에서 표를 끊어주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정겹다. 절벽과 지중해풍의 낯선 마을을 가로지르는 해안길은 발칸반도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도 꼽힌다.

섬마을은 육지와 섬을 가르는 운하 사이로 요트들이 늘어선 단아한 풍경이다. 초입에는 노천시장을 벗어나 작은 돌다리만 하나 건너면 뜨로기르 섬이고, 섬 입구에 서 있는 마을의 수호성인인 이반 오르시니의 동상이 이방인들을 반긴다.

아드리아해의 순풍이 닿은 포구

뜨로기르가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것은 섬 안 건물들이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도시 형성 과정에서 그리스인이 정착했고, 15~18세기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를 받은 과거는 섬의 개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조그만 섬마을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됐는데 섬마을 하나가 온전히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드문 경우다.

성 로렌스 교회
뜨로기르는 아드리아해의 풍취 외에도 숨겨진 생채기 때문에 더욱 아련하게 다가서는지도 모른다. 푸른 바다를 드리운 발칸 반도의 휴양지는 아픈 상처가 서려 있다. 크로아티아는 헝가리,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1차 대전 후에는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으로 통합된 과거를 지녔다. 5년 동안이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전쟁과 그 상흔은 건물만 온전히 남겨 놓았을 뿐 사람들의 가슴속에 울컥임으로 남아 있다.

중세의 흔적을 담고 있다지만 섬의 면면을 살펴보면 중부 유럽의 고성들처럼 위압적이거나 웅장한 것은 또 아니다. 오히려 그런 점들이 외부인들에게는 친근하게 다가선다. 섬은 바쁜 마음으로 반나절 걸으면 둘러볼 수 있는 아담한 규모다. 시청사 앞 이바나파블라 광장부터 해변까지는 비좁은 골목길이 이어지는데 투박한 돌담에 흰 빨래와 우연히 마주치는 작은 카페들은 섬의 은밀함을 더한다. 골목길은 운하를 낀 산책로로 연결되고 요트들이 정박한 산책로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 성당 등이 해변에 도열해 있다.

섬의 이정표가 되는 건물은 다. 크로아티아 최고의 건축물 중 하나로 로마네스크 기법에 다양한 양식이 덧씌워졌는데 베네치아풍의 사자 조각과 달마티아 지방 최고로 여겨지는 아담과 이브의 조각상이 명물이다. 종루에 오르면 뜨로기르 섬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붉은 지붕이 가득 늘어선 섬은 손 안에 담길 정도로 아담하다. 붉은 지붕들 사이로는 미로 같은 골목이 뻗어 있다.

로마네스크, 바로크 양식이 혼재된 건축물

섬안에는 헬레니즘 시대 때부터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성당, 궁전, 탑과 주거지들이 섬 안에 압축돼 모여 있다. 르네상스 양식의 루치 궁전, 11세기에 지어진 성 니콜라스 성당 등이 해변에 도열해 있고 산책로 끝자락 카메르렌고 요새가 섬의 정경에 마침표를 찍는다. 카메르렌고 요새는 섬이 오래전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곽도시였음을 보여준다.

트로기르 골목길
뜨로기르는 유고 내전에서 비켜나 예술미 넘치는 건축물들을 지켜낸 데서 더욱 의미 깊다. 건물의 아름다움을 거울처럼 받아낸 청아한 해변과 일상의 골목, 붉은 지붕 아래 삶의 단면 역시 완연한 조화를 이룬다. 뜨로기르 섬에서 다시 다리를 건너면 어촌마을의 삶이 담긴 치오보 섬으로 연결되는데 치오보 섬에서 바라보는 운하 너머 뜨로기르의 풍경이 또한 평화롭고 아름답다.

뜨로기르는 또 다른 세계유산인 스플리트 구시가와 더불어 함께 둘러보면 좋다. 스플리트는 로마 황제가 은퇴 후 노년을 보내기 위해 AD 300년경 궁전을 건립한 유서 깊은 도시다. 황제가 그리스의 대리석과 이집트의 스핑크스를 가져다가 꾸밀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쏟았던 궁전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매년 여름이면 스플리트에서는 서머페스티벌과 국제영화제의 막이 오른다. 자정 넘도록 관광객들과 이곳 청춘들이 뒤엉켜 맥주를 마시거나 벤치에 앉아 항구를 바라보며 낭만을 만끽하는 것도 꽤 운치 있다.

여행메모

가는길=뜨로기르는 스플리트를 경유하는게 일반적이다. 스플리트까지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를 거쳐 열차로 이동이 가능하다. 오스트리아에서 오는 장거리 버스나 이탈리아 안코나에서 페리를 타고 스플리트로 이동할 수도 있다. 스플리트에서는 직행, 완행 버스가 수시로 뜨로기르까지 운행하는데 출발 정거장이 구분돼 있으니 유념해야 한다.

음식=이탈리아 음식이 많이 들어와 있어 피자, 파스타 식당을 흔하게 찾을 수 있다. 레스토랑들은 성수기인 5~9월에 음식 가격이 꽤 비싼 편이다. 초입 장터에서는 현지 과일 등을 값싸게 구입할 수도 있다.

붉은지붕의 트로기르
기타정보=크로아티아 입국에 별도의 비자는 필요 없다. 숙소는 'sobe'라고 써 있는 민박집들이 묵을 만하다. 스플리트에 숙소를 정하고 하루코스로 여행을 다녀와도 무방하다. 성수기에 한시적으로 수도 자그레브까지 한국에서 직항편이 뜨기도 한다.



글 사진 서영진(여행칼럼니스트) aularg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