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위기는 곧 기회다. 한국전쟁의 비극으로 온 국토가 신음했던 1950년대 황폐화된 한국대중음악에도 부활의 기운의 싹트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 시기는 해방 이후 주둔하기 시작한 미군을 통해 실로 다양한 서구 음악장르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 대중가요계에는 몇 가지 트렌드가 생성되고 있었다. 장르적으로는 춤바람 난 당대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댄스의 열풍이 거셌고 노래의 소재는 항구와 마도로스의 이별과 사랑이 각광받았다. 또한 '부루스'라는 제목을 단 슬픈 노래들이 무차별적으로 양산되며 당대 대중의 심금을 울렸다. 1950년대에 봇물 터지듯 발표된 무수한 '부루스' 노래 중에 최대 히트작은 1959년 안정애가 노래한 '대전블루스'다. 이 노래는 1980년 리메이크해 빅 히트를 터트린 조용필을 오리지널 가수로 생각하는 대중이 많지만 1950년대에 '블루스의 여왕'으로 불렸던 안정애가 오리지널 가수다.

50년 후반을 풍미했던 당대의 인기가수 안정애가 발표한 블루스 노래들은 수도 없이 많다. 대전블루스, 순정의 블루스, 비정 블루스, 여인블루스, 다방블루스, 밤배의 블루스, 자매의 블루스, 카바레 블루스, 도라지 블루스, 호남선 블루스, 탄식의 블루스, 섬진강 블루스, 청춘 블루스, 연락블루스 등등. 그냥 슬픈 정조를 드러내려는 노래엔 대상에 상관없이 무엇에든 블루스를 제목에 가져다 붙이면 되었을 정도로 양산되었다.

해방 이후 '애수의 네온가'(박시춘 작곡), '청춘 부루스'(옥두옥 노래), 1955년 '무정 부르스'(백설희 노래), 1956년 '밤비의 부르스'(안정애 노래), 1959년 '대전부루스'(김부해 작곡)가 빅 히트를 터트린 이후 블루스란 제목을 단 노래는 60년대까지 뜨거운 기세로 이어졌다. 문제는 한국대중가요 초창기에 발표된 이같은 블루스 곡들은 대부분 정통 블루스가 아닌 일본풍 블루스 즉 트로트 블루스의 전형이었다. 1958년 발표된 색소폰 소리가 구슬픈 안정애의 '밤비의 블루스'가 그랬고 특히 밤무대 여급을 연상시키는 '순정의 블루스' 가사는 '퇴폐하고 저속하다'는 이유로 금지의 멍에를 쓰기도 했다.

전직 승무원 실화 소재 작사

안정애의 '대전블루스'도 예외는 아니다. 열차에서의 이별을 대표하는 명곡으로 각인된 '대전블루스' 또한 무수한 이별이 이뤄지는 공간을 소재로 슬픈 사랑이야기를 트로트 멜로디에 담아냈다. 제법 구체적 공간과 상황 설정은 이 노래가 실화를 소재로 탄생비화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1950년대 대전역 부근. 자정이 넘어가는 시각에 목포로 가는 '대전발 0시 50분' 열차를 타러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들고 있었다. 그때 대합실 청소를 막 끝낸 열차 승무원은 하루의 피곤을 달래려 기지개를 쭉 폈다. 그런데 플랫폼에서 청춘 남녀 한 쌍이 두 손을 마주잡고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움직이지도 않고 바라보던 두 사람은 증기기관차가 들어오자 남자 혼자서 열차에 올라탔다. "대전발 0시 50분 목포행 완행열차가 곧 발차하겠습니다." 졸린 목소리의 안내방송이 역사에 울려 퍼지면서 목포행 완행열차는 천천히 플랫폼을 빠져 나갔다. 홀로 남겨진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배웅하고 난 후, 열차가 다 떠나간 뒤에도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 장면을 연출했다. 한참 동안 이 광경을 지켜보던 열차 승무원은 문뜩 영감을 받아 훗날 가사로 썼다. '대전 블루스'다.

당시 열차 승무원은 바로 아세아레코드 대표가 된 작사가 최치수다. 경남 울산 태생인 그는 음반 산업에 투신하기 전에 오랜 기간 열차 승무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14년 넘게 열차와 희로애락을 같이 한 그는 기억에 생생한 당시의 풍경을 신신레코드 영업부장으로 있던 1956년 대전 블루스의 가사를 처음 썼다. 이후 최치수의 가사를 받은 작곡가 김부해는 이별의 정한을 표출하기에 그만이고 당대에 각광받았던 블루스로 리듬을 정한 뒤 3시간여의 작업 끝에 곡을 완성시켰다. 1959년 신세기레코드는 이 노래를 취입할 가수로 블루스를 잘 부르기로 소문난 '블루스의 여왕' 안정애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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