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조선인 혁명가 박열(1902~1974년)은 강심장이었다. 일본 경찰과 검찰은 천황 암살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박열을 재판정에 세웠다. 조선 관복을 입은 박열은 1926년 3월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웃으면서 우리말로 재판장을 훈계했다.

박열과 옥중 결혼한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1903~1926년)도 사형 언도를 받았다. 일본인으로서 조선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된 가네코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재판에 나서 제국주의 반대를 외쳤다. 박열 부부에게 감동한 재판장은 박열에게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파면됐다.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1923년 일본은 아비규환이었다. 일본군과 경찰은 당시 유언비어를 살포하면서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를 학살했다. 일본 경찰은 9월 3일 비밀결사 단체 불령사를 이끌었던 박열과 가네코를 붙잡았다. 히로히토 천황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던 박열은 의열단을 통해 폭탄을 사려고 했다. 폭탄을 구하려던 계획이 경찰에게 발각되자 박열은 당당하게 '히로히토 천황을 죽이려고 폭탄을 구했다'고 밝혔다.

박열은 일본이 패망한 1945년에야 석방됐다. 스물한 살 청년 박열이 마흔네 살까지 감옥살이하는 동안 많은 일이 벌어졌다. 박열과 가네코의 사랑은 검사와 판사를 감동하게 했다. 박열 부부는 이들의 선처로 감옥에서 사진을 찍었다. 훗날 이 사진이 공개되자 당시 일본 내각은 총사퇴했고 사진을 찍도록 허락한 사법관은 파면됐다. 박열이 석방되자 형무소 소장은 조선인 앞에서 참회하면서 제 아들을 박열에게 양자로 바쳤다.

공산주의에 반대했던 박열은 1949년 영구 귀국했다. 1926년 옥중 사망한 일본인 아내 가네코의 유골은 비밀리에 박열의 고향 경북 문경에 묻혔다. 남편 박열은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됐다. 공산주의에 반기를 들었던 남편은 1974년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고,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던 아내는 식민지였던 남편의 고향에 묻혔다.

감옥에서 결혼한 이들은 죽어서도 함께 하질 못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