鳥獸哀鳴海岳嚬(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리니)

槿花世界已沈淪(무궁화 세상이 이미 가라앉았구나)

秋燈掩卷懷千古(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날을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세상에서 지식인으로 살기 어렵구나)

인조 반정 이후 약 300년 동안 집권한 노론 당수 이완용이 조선을 일본에 넘기는 대가로 호의호식할 때 전남 구례에서 은거하던 선비 황현은 식음을 전폐하더니 하룻밤에 절명시 네 편을 짓고 목숨을 끊었다. 조선말 유학자 매천 황현은 1910년 9월 10일 몸에 독이 퍼지자 자식을 불러 "내가 죽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오백년이나 됐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 죽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양명학과 실학에 관심이 많았던 황현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을 겪으며 보고 들었던 정보를 종합해 야사 매천야록(梅泉野錄)을 편년체로 저술했다. 매천야록에는 고위 관리의 비리와 일제의 침략상과 함께 민족의 끈질긴 저항이 담겼다. 후손과 지인이 간직했던 매천야록은 해방된 이후에야 공개됐고 국사편찬위원회는 매천야록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한국사료총서 제1집으로 발행했다.

사기(史記)에는 "군자는 난리에 의로써 죽는 것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긴다(是以君子以義死難 視死如歸)"는 구절이 있다. 황현을 비롯한 순국선현의 죽음은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황현이 증오했던 친일파들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자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미 군정은 친일파 경찰을 감쌌기에 독립운동가보다 친일파가 득세할 수밖에 없었다.

국회는 1948년 미군정의 보호 아래 똬리를 튼 친일 부역자를 단죄하고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구성을 가결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 지시를 받은 서울 중부서 윤기병 서장은 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반민특위가 무너지면서 친일파는 기득권을 유지했다.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했기에 지금까지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일본군 장교의 딸은 집권여당 대통령 후보가 됐지만 독립군 장교의 아들은 부친 타살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