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중음악 역사에서 1950년대는 미개척지로 남아있다. 해방 이전보다도 자료보존이 빈약한 이 시기의 대중음악 연구와 발표된 노래들의 정확한 실체 찾기는 마치 달나라로 가는 미지의 여행과도 같다. 실제로 50년대 대중가요들은 작사, 작곡, 편곡, 연주자의 크레디트는 물론이고 발표 년도와 제작 음반사조차 불명확한 혼돈의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금사향(본명 최영필)의 대표곡 '홍콩아가씨'는 50년대를 대표하는 히트곡이자 지금도 불리어지는 국민애창곡이다. 가난했던 50년대 대중에게 이국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 이 노래 역시 그동안 발표 연도가 정확하지 못했다. 전쟁의 우울함을 잠시 잊게 해준 중국풍의 경쾌한 멜로디가 인상적인 이 노래의 원제목은 '香港아가씨'로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2년에 손로원이 작사하고 이재호가 작곡한 노래다. 그래서 그동안 1952년에 발표된 노래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결혼을 하고 부산에서 취입했었다'는 금사향 선생의 증언과 1954년 발표된 한정무의 <꿈에 본 내 고향>과 함께 수록되어있는 것으로 미뤄 음반으로 공식 취입된 것은 1954년이 분명해 보인다.

부산 피난 1954년 취입

'향항아가씨(홍콩아가씨)'는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피난 온 한복남이 창립한 도미도레코드를 통해서 처음 발표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극심한 경제적 궁핍으로 고단한 삶을 살았던 50-60년대 대중에게 '홍콩'이라는 말은 공간적 개념보다 자유, 동경, 향락,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정신적 개념이 강했다. 70년대부터 널리 유행했던 '홍콩 간다'는 말은 '기분이 좋아 헤롱거린다', '뽕간다' 등의 뜻으로 쓰였다. 실제로 당시엔 중국 음식점 간판들은 북경반점보다 홍콩반점이 더 많았다. 금사향의 차별성은 독특한 보컬 음색뿐 아니라 무대를 가리지 않았던 열정의 화신 같은 화통한 성품을 빼놓을 수 없다.

금사향은 1929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46년 상공부 섬유국 영문 타이피스트로 근무하던 중, 작곡가 박시춘과 작사가 조명암이 심사를 본 럭키레코드사 주최 전국 가수선발 경연대회에 출전해 박재홍에 이어 2위에 입상한 그녀는 서울중앙방송국(KBS전신)의 1기 전속가수가 되었다. 애교 넘치는 은방울 같은 목소리를 지닌 그녀는 박시춘으로 부터 '오빠는 풍각쟁이야'로 유명한 박향림의 후계자가 될 재목으로 칭찬을 받았다.

19세 때 발표한 데뷔곡 '첫 사랑'이 좋은 반응을 얻었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금사향은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 위문 공연장을 누비며 노래했던 열혈여장부였다. 트럭 두 대를 연결해 만든 간이무대에서도 군인들을 위로했고 폭우가 쏟아지는 야외무대에서는 감전될까 염려되어 저고리 고름으로 마이크를 감싸 쥐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녀는 국군위문단으로 최전방에 공연을 갔을 때 알게 된 노래 잘하는 젊은 군인이 다음 날 무장공비에 의해 사망하는 상황에서도 무대에 오르는 강단을 보였다. 다들 만류했지만 전우를 잃은 이들의 마음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던 그녀의 강직한 성품을 읽을 수 있는 에피소드다.

1952년 한국전쟁 중에 오리엔트레코드를 통해 발표한 '님 계신 전선'은 남편을 전선으로 떠나 보낸 아내와 그 가족들의 슬픔을 애잔하게 노래했다. 이 노래 역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전쟁터를 누비던 금사향을 인기가수로 견인했다. 당시는 공연만 하는 가수와 레코드 취입만 하는 가수가 따로 있었다. 그래서 무대에서 노래는 불렀지만 음반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가수가 허다했다. 문학적 재질이 있었던 금사향은 작사 작업에도 재능을 보였지만 유달리 작은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레코드 취입가수로만 활동을 하려고 했다. 당시 한복에 하이힐을 신고 무대에 오른 가수는 그녀가 최초였다고 전해진다.

'증류수'같은 목소리란 평가처럼 간드러지면서도 맑고 청아한 금사향의 보컬은 귀에 콕콕 박혀오는 독특함이 있다. "'홍콩아가씨' 덕분에 도미도레코드가 벽돌집을 샀다"는 소문까지 나돌게 했던 이 노래는 금사향의 대표곡이 되었고 시대를 초월해 수많은 후배가수들이 리메이크 작업에 기꺼이 동참한 명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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