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글은 가장 과학적인 글자로 손꼽히지만 조선 시대에 푸대접을 받았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1444년 훈민정음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앞세웠던 조선에선 한글을 만드는 행위가 중국에 대한 반대로 여겨졌다. 최만리는 한글을 신묘하고 뛰어난 문자라고 칭찬했지만 중국을 섬기는데 부끄러움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하며 고유 문자를 가진 민족은 모두 오랑캐라고 주장했다. 한글은 언문(諺文)으로 불렸지만 천민, 상민, 여인이 쓰는 글이란 뜻으로 쌍글(상글), 똥글, 암클(암글)이라고도 불렸다. 이런 까닭에 시인 고은(79)은 어린 시절 서당 훈장에게 한자를 익히고 마을 머슴한테서 한글을 배웠다.
세상이 바뀌었으나 한글은 여전히 외국어 때문에 설움을 겪었다. 일제 강점기엔 일본어 때문에, 오늘날엔 영어 때문에 뒷전으로 밀렸다. 최근엔 영어 발음을 위해 아이에게 혀 밑을 절개하는 수술을 받는 일까지 생겼다. 지식인과 연예인은 글과 말로 얼토당토아니한 국적 불명의 영어를 사용하곤 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엘레강스하고 시크한 언어로 오소독스한 한글을 멘붕에 빠트렸다.' 해마다 한글날이 되면 한글날을 법정공휴일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지만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겨레말을 담는 한글을 살리는 운동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