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달인들의 소박한 반주와 담백한 보컬

또 하나의 숨겨진 명반이 봉인을 풀고 세상에 나왔다. 이 땅에 본격적인 일렉트릭 블루스 기타 사운드를 선보였던 이정선의 7집 <30대>와 그가 참여했던 신촌블루스 1, 2집은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으로 회자되는 명반들이다.

과연 그의 디스코그라피에서 반듯이 거론해야 되는 중요 음반은 그게 전부일까? 아니다. 이정선의 데뷔 초기 음반들은 금지로 얼룩진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대중적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음반들이 많다.

특히 이정선 공식 1집은 대중가요음반사에 사례를 찾기 힘든 황당 비화를 남긴 음반으로 유명하다. 그러니까 이정선에게는 1976년 발매된 공식 1집이 있고 그 이전에 0집으로 언급되는 앨범 재킷이 다른 음반이 또 있다.

두 음반의 재킷을 보면 장발의 자유스런 모습과 '모범생' 같은 착실한 이미지의 짧고 단정한 머리 스타일을 한 이정선이 있다. 이정선은 왜 이렇게 공식 데뷔음반이 복잡한 사연을 가지게 되었을까?

공식 데뷔앨범을 녹음했던 당시 이정선은 서울시내 중심의 달동네(충무로4가)에서 살았다. 집 아래층이 두부공장이라 밤 세워 기타를 쳐도 아무도 말하지 않아 좋았다고 한다.

0집 재킷은 그가 살던 동네 뒷골목 공중화장실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런데 음반발표 직전, 예륜 심의에서 재킷을 장식한 이정선의 장발모습을 문제 삼아 판매금지처분이 내려졌다.

첫 음반에 이어 다시 제작한 2번째 판까지 찍자마자 또 검열에 걸려 공식 데뷔음반을 발매를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는 영원히 음악을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머리를 시원하게 확 자르고 사진을 다시 찍어 그는 회사에 맡겨 버렸다.

그렇게 절박한 심정으로 머리를 단정하게 자른 사진을 수록해 음반을 다시 찍었을 때 "또 죽여 버리든지 맘대로 해라 이것만 내고 다신 음악 안 하겠다."는 심정이었다.

문제는 장발 사진이 문제가 된 1975년 0집 이전에 그에겐 소위 '마이너스집'으로 불리는 진귀한 음반이 한 장 더 있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40년 만에 재발매되는 이정선의 비공식 데뷔앨범이다.

이 음반은 지난 2005년 한 인터넷 음반경매 사이트에서 당시로는 국내 대중가요음반 경매사상 최고가인 176만원에 낙찰이 되어 음반수집가들 사이에서 화제의 중심으로 떠오른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이정선은 "가끔 내 초기 음반들이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는 걸 보면서 왜 저렇게 심하게들 수집할까 생각해 보았다. 이따금 그렇게 고가에 거래된다면 내 것을 팔아버릴까 생각도 한다(웃음)"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큼 그의 초기 음반들은 그의 음악인생에서 큰 상처로 남겨 있다는 증거다.

그의 첫 독집은 1973년 별다른 홍보도 없이 세상에 나왔다 사장된 초 희귀음반이다. 당시로서는 드문 창작곡들로 구성된 이 음반은 프로가수를 꿈꾸며 오랜 기간 준비한 음반이 아니라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학비를 벌기 위해 단기간에 만든 음반이다.

음악을 막 시작한 통기타 가수시절에 발표한 음반이기에 그저 소박한 통기타 반주로 구성된 포크 음반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아니다. 이 앨범에는 당대 기타의 달인이라 불릴 만 한 이정선과 오세은이 어쿠스틱 기타를 맡았고 일렉트릭 기타는 김영배, 베이스기타는 최영택, 키보드는 김영준, 이영림은 퍼큐션을 맡아 꽉 찬 사운드를 구사한다. 또한 관악기를 덧붙인 브라스 사운드까지 시도하며 제법 탄탄한 밴드 시스템을 구축해 녹음을 시도한 음반이다.

경쾌하게 시작되는 타이틀 곡 '이리저리'에서는 혼성듀엣 '원플러스원'의 박헌룡이 이정선과 듀엣 보컬시스템으로 근사한 하모니를 구사한다. 또한 개그맨 고영수, 혼성듀엣 '원플러스원', 김성은, 김성희, 이애리등 상당히 많은 음악친구들이 요소요소에 코러스에 참여해 꽉 찬 사운드를 시도했다.

소박한 기타 반주와 청년 이정선의 담백한 보컬로만 구성된 '내게 주는 노래'나 잔잔한 키보드 반주로 노래하는 '가려는가' 그리고 건전가요풍인 '모두 다 함께' 같은 포크 질감의 노래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리듬감이 살아있는 곡들이 주를 이루고 있기에 이 음반은 포크 록 음반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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