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순간의 애달픔을 스케치한 반야월 가사 압권

대중가요는 시대의 거울이다. 시대와 공간을 떠나 대중의 생활상과 격변의 사회상을 여지없이 담아온 대중문화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과거 문경새재와 함께 서울로 가는 대표적인 국토의 길목이었던 '박달재'를 넘어보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국민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애창곡으로 꼽았던 이 노래는 그의 생을 대변하는 것 같은 노랫말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울고 넘는 박달재'는 한국전쟁을 목전에 둔 1950년 태어났다. 작사가 반야월(2012년 작고)의 노랫말에 작곡가 김교성(1960년 작고)이 멜로디를 붙인 이 노래를 가수 박재홍(1989년 작고)이 부르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시대를 초월해 수많은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며 국민가요의 반열에 올랐다. 박재홍의 구수한 노래와 김교성의 애절한 멜로디도 훌륭했지만 무엇보다 박달재가 지닌 이별의 순간과 기다림이라는 애달픈 사연을 그림을 그리듯 스케치한 반야월의 가사가 압권이다.

발표된 지 63년이 넘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노래가 지금까지 노래방과 각종 술자리에서 많은 대중에 의해 애창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운명 같은 만남과 사랑 그리고 죽음이라는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삶의 단상을 절묘하게 그려낸 반야월의 노랫말 때문이다.

리드미컬한 반주에 담담한 음성으로 노래하던 박재홍의 목소리가 절정부에 이르면 노랫말이 발휘하는 극한의 감성적 화학작용은 절규에 가까운 뭉클함을 전해준다. 전국 방방곡곡에 무수하게 세워진 노래비들이 입증하듯 한국인의 보편적 감성을 시적 언어로 승화시킨 그의 노랫말들은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 분단과 6·25 전쟁의 비극, 남녀의 오만 사랑을 서정적으로 담아내며 대중가요 가사 작법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이 노래가 처음 발표된 것은 고려레코드를 통해서다. 일제강점기부터 음반과 악기를 판매하는 일을 했던 이 음반사의 창설자 최성두는 한국 최초의 남성사중창단 '연희전문 사중창단'의 제2테너,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하며 1934년 음악단체 '전조선음악동호회'를 조직했던 인물이다.

서울 충무로에 본사를 두고 마장동에 공장을 설치한 고려레코드는 1947년 8월 이후부터 해방 이후 최초의 대중가요로 알려진 '흘러온 남매'와 분단의 비극을 상징하는 '가거라 삼팔선', '울고 넘는 박달재' 같은 한국 대중음악사적으로 중요한 노래들을 생산해 냈다. 고려레코드는 1954년 이후 유니버살 레코드로 그 명맥이 이어졌다.

가슴을 적시는 반야월의 노랫말과 김교성의 애절한 선율, 박재홍의 구슬픈 창법으로 노래가 발표한 지 한 달 후 6.25전쟁이 발발했지만 노래에 담긴 애절한 정서는 당대 대중의 무한 공감대를 형성시켰다. 가수, 작사가, 작곡가 모두를 당대 최고의 음악인으로 견인한 이 노래는 1948년 가을날, 남대문악극단 지방순회 공연 중에 탄생됐다.

이제는 터널이 뚫려 아무도 찾지 않는 길이 되었지만 과거엔 지름길이었기에 모두가 이 험한 박달재를 넘어야 했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의 험한 박달재를 넘어가는 자동차들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열악한 기술수준이었기에 통과의례처럼 고장이 나 쉬었다 가야 했다.

서울서 내려온 남대문악극단원들을 태운 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충주에서 제천으로 가는 도중 박달재 정상에 오를 때 이들을 태운 버스도 타이어가 펑크나 서버렸다. 운전기사와 조수가 수리를 하는 동안 배우 김진규, 이예춘, 허장강과 함께 버스에서 내린 반야월은 잠시 나무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며 박달재의 수려한 풍경을 구경하던 중 우연하게 한쪽에서 부둥켜안고 흐느끼는 젊은 부부의 이별장면을 보게 되었다.

반야월은 남편의 허리춤에 도토리묵을 싸주며 오열하는 젊은 여인의 모습을 보고 느낀 감흥을 숙소에 돌아와 비 오는 날 박달재에서 이별한 뒤 홀로 남아 가슴이 터지도록 울면서 소리치는 애절한 가요 시로 남겼다. 당대 서민들의 생활상과 함께 임을 놓아주고 싶지 않은 여인의 애정이 절로 묻어나는 기막힌 가사였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