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대통령 시안(西安) 방문과 은대(殷代) 홍도관중국 고대 은주(殷周) 교체기 상황 갑골문으로 기록… 세계 유일 보물동북아 고대사 새로 써야 할 내용 담겨… 고조선 역사 바뀔 수 있어

중국 은주(殷周) 교체기 상황을 갑골문으로 새긴 은대(殷代) 홍도관
박근혜 대통령은 나흘간의 방중(訪中) 기간 중 지방도시 산시성(陝西省)의 성도(省都)인 시안(西安)을 방문해 주목을 받았다.

역대 대통령들이 주로 상하이(上海)나 칭다오(靑島)를 방문했던 것에 비해 박대통령의 시안 방문은 이례적인 행보로 그 도시가 지닌 특성을 통해 방중의 의미를 배가시키려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안은 3000년의 역사를 지닌 문화적 고도(古都)이자 중서부 대개발의 거점이고 한국 기업들의 진출이 활발한 곳이다. 박 대통령은 시안 방문으로 중국의 문화를 존중하고 한중 경제협력을 강화해가겠다는 메시지를 전한 셈이다.

특히 시안은 3000년 전 주(周)나라 시절부터 중국의 역대 13개 왕조가 도읍지로 삼았던 곳으로 유구한 역사문화재들로 인해 '중국 문화유산의 보고'로 불리며, 중국이 자랑하는 '진시황의 병마용', 양귀비의 목욕탕인 '화칭츠'(華淸池),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의 '건릉'등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그래서 "중국의 100년 역사를 보려면 상하이, 1000년 역사를 보려면 베이징, 3000년 역사를 보려면 시안으로 가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시안 방문을 계기로 더욱 주목받는 사안이 있다.

시안을 처음 도읍으로 세운 주(周, BC1046~BC256)나라와 그 이전 천자국이었던 은(殷, BC1600~BC1046, 商상으로도 불림)의 교체기를 기록한 특별한 유물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주나라 무왕(武王)과 은의 마지막 왕 제신(帝辛, 주왕紂王)의 결전을 앞둔 상황을 기록한 은대(殷代) 홍도관(紅陶罐, 붉은 단지)이 그것이다.

이는 세계 유일의 고대 유물로 중국은 물론,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 고대사를 새로 써야 할만큼 중대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西安의 정신적 지주, 주나라 문왕(西伯)

시안(西安)에 대해 일반인들은 한나라와 당나라의 도성이었던 장안성과 세계8대불가사의 중 하나인 진시황릉의 주인공 시황제(BC259~BC210)를 떠올린다.

하지만 시안에 도읍을 최초로 세운 역사적 인물이 <주역(周易)>의 저자인 주나라 문왕(文王: BC12세기~BC11세기경)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문왕이 수도를 세운 이래로 시안은 3100여 년의 성(城) 건립역사와 1200여 년의 도읍지 역사를 자랑한다.

시안의 주나라 당시 명칭은 '풍호(豊鎬)'였다. 풍호는 주 문왕과 그의 아들 무왕이 닦아세운 豊京(풍경)과 鎬京(호경)을 합한 명칭이다. 서한 초에 이르러 유방이 '장안(長安)'이라 했는데 그 의미는 '오래도록 다스리고 오랫동안 평안함'이다. 수나라 때는 크게 흥기한다는 의미의 '大興城(대흥성)'이라 불렸고, 당나라 왕조 시엔 '장안'이란 명칭을 회복했다가 원나라 때는 원나라를 받듦을 뜻하는 '奉元城(봉원성)'이라 바뀌었다. 그 후 1369년 명나라 정부가 '서북의 안정'이란 의미의 '西安府(서안부)'로 고쳤는데 이것이 바로 현 명칭의 유래가 된다.

이처럼 최초로 시안을 도읍지로 삼아 그 후 오랫동안 세계적 역사문화의 중심지로 만든 주나라 문왕은 시안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이다. 중국인들은 물론이거니와, 우주론적 철학서인 <주역>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수많은 세계인들 또한 주문왕을 깊이 존경한다.

문왕은 본래 갑골문으로 유명한 상(商)나라의 제후였다.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史記)> 등에서 증명되듯, 천자국 상나라는 휘하의 수백 제후들 중에서 본명 '희창(姬昌)'인 문왕을 서방의 으뜸 제후라는 의미로 '서백후(西伯侯)', 또는 줄여서 '서백(西伯)'이라 칭했다. 西伯이란 칭위는 문왕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 '희발(姬發)', 즉 무왕(武王)이 계승했다. 무왕은 선정을 닦은 부왕의 뜻을 잃지 않고 절치부심한 끝에 마침내 갑자(甲子)일에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천자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문왕의 文과 西伯이 새겨진 홍도관 한국에 존재

그처럼 주나라 文王과 武王의 글자가 기록된 고대 청동기 유물은 적지 않게 발견됐지만, 두 사람의 또 다른 '서백(西伯)' 칭위가 새겨진 상나라 또는 주나라 당시의 유물은 그간 발견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나라 희창(姬昌)의 왕칭인 '文'은 물론, '西伯'이 새겨진 은나라 최후의 천자 '제신(帝辛)'의 유물이 최근 3000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주간한국>은 지난 2311호(2010년 2월23일 자)에서 '은(殷) 홍도관 고대사 새로 쓰나' 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중국 은주(殷周) 교체기 상황을 기록한 은(殷) 문물(홍도관)이 한국에 존재하고, 세계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 최초의 왕조인 상(商, 또는 殷)나라는 1899년 은허(殷墟) 유적이 발굴되면서 그 실체가 알려졌으며, 당시 발견된 갑골문(甲骨文)은 한자(漢字)의 기원으로 전해진다. 우리 역사와는 고조선과 관련 있다.

문제의 홍도관은 1990년대 초 중국 요녕성 지역에서 발견됐으나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단순한 공예품 정도로 인식된 채 2005년 한국으로 건너왔다. 평범한 도자기로 여겨지던 홍도관은 2006년초 고문자 연구가인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이 홍도관에 새겨진 은대의 글자를 해석하면서 국제적인 관심 대상으로 부상했다.

이 홍도관 바닥 부위에는 은나라 때만 쓰였던 독특한 '占(점)'자가 새겨져 있으며 어깨 부위에는 60개의 글자가 2개조로 새겨져 있다.

박대종 소장의 <商帝辛(상제신)의 점도문에 관한 연구> (2012년 개정판) 논문
박대종 소장은 자신의 <商帝辛(상제신)의 점도문에 관한 연구>(2006년) 논문에서 홍도관의 은문(殷文) 61개 글자가 은왕조 마지막 왕인 제신(帝辛, 주왕紂王)이 주(周)나라 무왕(武王)과의 국가 흥망이 걸린 결전을 앞두고 별점(星占, 角星占)을 친 내용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61개의 갑골문자는 홍도관 어깨부위에 각 30자씩 2조로 나뉘어져 있는데 박대종 소장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복사: "불길하게도 대낮에 금성이 나타났습니다. 신(辛)의 군대를 출병시킬까요? 주후서백(周侯西伯)의 군대와 그의 우군들이 주(州) 서읍으로부터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 없을까요? 조왕 문정과 부왕 제을께서 돕고 지켜주실까요? 엄정한 기강이 무너지고 방임되는 일이 있을까요? 과연 서백후(西伯侯)로부터 그러한 일이 있었다. (金見. 率辛師? 亡周侯元西伯行右師田自州西邑? 祖丁乙爪? 有明紀斁任? 允自西伯侯.)"

제2조 복사: "조왕 문정과 부왕 제을이시여! 문(文)을 치기 위해 저녁에 제를 올리면, 우리 군대가 승리를 획득할 수 있을까요? 정수(井宿)에 제를 올리면 짐이 재앙을 막을 수 있을까요? 왕이 성조를 살펴 길흉판단을 해 가로되, '각성(角星)이 밝게 빛나니, 나는 문(文)의 세력을 정벌해 배(나라)를 평안하고 고요하게 이끌 것이고, 승리를 획득한 후에는 서읍을 분봉할 것이며, 재앙은 능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祖丁乙! 征文夕祀, 辛丁乙師眉走? 亯井, 朕御皿? 曰: 角眀, 有余征導舟0玄, 田封, 它肯御.(0=民밑에 巴))"

박 소장의 논문을 검토한 중국의 저명한 고문자학자인 중산(中山)대학 진위담(陳煒湛) 선생은 "이 발견은 전 중국, 더 나아가서는 세계를 진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진 선생은 홍도관이 대단한 가치를 지닌 진품임을 인정하면서 박 소장에게 열석광(Thermoluminescence: TL) 검측을 통해 홍도관의 연대를 확실하게 밝힐 것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열석광 검측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홍콩, 중국, 영국 세 나라에서 순차적으로 실시했는데 모두 1899년 갑골문 발견 이후 현대인에 의한 위작품이 아닌 진품으로 판명했다. 특히 중국의 경우, 중국 국가문물국 보호과학기술 창신(創新) 일등상을 받은 중국 내 관련분야 최고 전문가인 하군정(夏君定) 선생을 한국에 파견해 측정케 하고 2010년 1월 중국 문화부 문물보호기술 직인이 찍힌 측정결과보고서로 이를 확인해주었다. 보다 정밀한 연대측정을 위해 2012년 2~3월에 실시한 세계최고 수준의 영국 옥스퍼드 감정공사의 측정결과는 지금으로부터 1700~2700년 전이었다.

이와 같은 결과는 홍도관이 출토된 지 20년 이상이 지났고, 뜨거운 햇볕을 쬐거나 뜨거운 물로 세척하는 등의 과정을 겪을 경우 도기의 열석광 연대가 감소한다는 과학적 사실을 고려할 때, 이 도기가 검측 최대치 '거금 2700년 전' 보다 더 이전에 소성되었음을 과학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그 표면의 글자들은 모두 홍도관이 고온에 구워지기 전(前) 아직 말랑말랑할 때 새겨진 것들로 이를 전문용어로는 '전각(前刻) 명문'이라 한다. 전각된 명문이 있는 도기의 경우엔 정확한 연대판단을 위해서는 명문을 감정한 연대가 열석광 측정연대보다 더 우선시된다.

홍도관 명문 해독자인 박 소장은 그의 논문 <상제신의 점도문에 관한 연구>에서 "홍도관 바닥 부위의 (占점)자는 은대만의 독특한 글자체로 이 홍도관이 은나라의 기물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어깨 부위의 (朕짐)자는 이 홍도관이 은왕의 유물임을 나타낸다"고 밝혔다. 또한 진위담 선생은 "어깨부위의 (周)자에 대해 口자가 포함된 周자는 주나라 갑골에 보이는데, 그 시대는 상나라 제신 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힌 바. 이 세 글자만으로도 은나라의 마지막 왕 帝辛의 홍도관임이 입증된다.

대만 제신홍도관에 큰 관심

이처럼 영국 옥스퍼드 감정공사의 2012년 3월 8일 발표로 제신홍도관의 진위여부가 최종적으로 판명되자, 중국역사문화의 또 다른 중심축인 대만의 언론들이 이를 크게 다뤘다. 특히, 대만 신생보(新生報)는 2012년 7월 5일 '은나라 유물 한국에 현신, 별점이 기록된 홍도관 출토(殷商古物現身韓國占星紅陶罐出土)'라는 제목과 "천기가 암장된 제신홍도관 갑골문", "검측으로 正身이 증명된 은나라 유물", "역사적 가치 돈으로 헤아리기 어렵다"등 7개의 서브타이틀로 은나라 마지막 황제 제신이 목야의 전쟁 직전 별점을 치고 그 점괘를 새겨 남긴 홍도관을 전면 특집으로 보도했다. 신생보의 보도 내용 중 주목할 만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도기상에 새겨진 갑골문은 드물 뿐만 아니라 물건이 거의 완정에 가까운 것은 더욱 보기 어렵다. 그리고 출토된 물건 위에 새겨진 갑골문 내용을 연구해보면 점복으로써 길흉을 묻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아직까지 별점 사실(史實)을 기술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 관계로 은(殷) 주왕(紂王=帝辛) 홍도관의 출토는 별도로 상나라 문화의 새로운 영역에 대한 하나의 연구를 개창하는 것이 된다."

"특히 홍도관 상에 새겨진 갑골문은 상나라 주왕이 별자리 모양을 관찰하고 주나라 무왕을 토벌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어, 이 홍도관이 상나라 주왕의 왕실유물일 수 있음을 증명, 가히 일건의 세계급 문화유산이자 세상에 보기 드문 진귀한 물건이라 할 수 있어, 그 중요성 및 역사 형성에 대한 충격은 모두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과소평가할 수 없게 만든다."

"이 60개의 글자들은 3000여년 전 주왕과 주후서백간의 전쟁을 앞둔 장면을 생동감 있고 완전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왕은 금성이 대낮에 출현한 사실을 흉조로 여기고, 국가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이성제성(以星制星)'의 전략적 사고 하에 각성(角星) 별점을 진행해, 금성으로부터 야기된 불안을 저지해낼 것이라 판단하고 있는데 그것이 갖고 있는 역사적 가치와 의의는 확실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신생보는 홍도관의 내용인 '무왕벌주'(武王伐紂), '목야(牧野)의 전쟁'이 그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라며, 제신홍도관의 출토는 고대도자발전사 발전과정을 명백히 나타냈다는 의의 외에 그 위의 갑골문 또한 은상시대 언어문자학 및 천문성상학 방면에 대한 천석(闡釋:명백히 밝히고 해석함)을 갖추고 있다는 의의가 있다고 했다.

이어 신생보는 홍도관의 가장 적극적인 의의는 상(商)과 주(周) 왕조가 서로 대항하는 균형성을 취득했을 뿐만 아니라, <사기(史記)>, <상서(尚書)>에 기술된 역사 내용의 진실성을 다시 한 번 검증해줬다는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는 확실히 돈으로 값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크다고 했다.

또한, 대만의 저명한 고문자 전문가인 동해(東海)대학교 주기상(朱岐祥) 교수는 홍도관을 접하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홍도관 상의 문자들은 당연히 위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홍도관은 고고학자와 문자학자들이 한 자리에 앉아 역사적 수수께끼를 탐구해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하면서 제신홍도관에 대한 높은 관심을 피력했다.

중국 하상주단대공정의 분수령, 목야대전(牧野大戰)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갑자일 '목야대전'(牧野大戰)은 중국 고대 역사상 매우 중대한 사건이다. 그것은 중국문명사의 공백을 메울 목적으로 중국 정부가 제9차 5개년계획의 중점과학기술 프로젝트로 지정,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진행한 연대학 연구사업인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 중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는 부분이었다. 그 연대가 바로 잡혀야 상나라는 물론, 그 전의 하(夏)나라와 그 후의 주나라 연대가 바로 정립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나라가 멸망된 연대에 관한 기존 학설은 모두 44종이 있었다. 가장 이른 것이 BC1130년, 가장 늦은 것이 BC1018년으로 그 차이는 무려 112년이나 됐다. 중국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상왕조의 멸망 연대를 BC1046년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상주단대공정은 국제학술계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비록 중국 정부가 5년에 걸쳐 야심차게 역사학, 고고학, 천문학, 연대측정학 등의 분야에서 2백여 명의 전문가들로 하여금 하ㆍ상ㆍ주 3대의 연대를 새로이 고증케 했지만, 국제적으로 신뢰도가 낮은 탄소14 측정법(OxCal 프로세스 시리즈 샘플계산법)을 채용하는 등, 그 연구방법이나 결론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스탠포드대학 종교문화센터의 겸직연구원인 장조체(蔣祖棣)가 제출한 '서주연대연구의 의문 - 하상주단대공정 방법론의 비평'글은 물론, 심지어 2003년 12월, 중국사회과학원, 호북민족학원의 전문가들이 집대성한 <고사고(古史考)>에서조차 하상주단대공정의 결론을 철저히 부정하고 있는 상태다.

중국 정부는 2000년 5월 11일 하상주단대공정 영도소조의 회의 시에, 공정의 특별 고문이었던 송건(宋健)과 이철영(李鐵暎) 의 다음 연설 내용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송건은 "중국 고대사는 끊임없이 연구되어야만 한다. 날조되거나 근거 없는 억측이 아닌 과학적이며 진실한 새로운 발견과 새로운 이론을 적극 지지하고 장려해야만 한다. 하상주단대공정에서 제시한 결과는 절대적일 수 없다는 점에 나는 적극 찬성하는 바다"고 말했다. 이철영은 "이번 연구가 당대 중국 과학자들이 달성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것일 뿐 결코 궁극적인 진리가 아님을 진지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세계 각지의 학자 및 중국인들이 지금의 성과를 수정 보완하여 더욱 정확하고 완벽한 결과를 내놓을 수 있도록..."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금성이 대낮에 은나라 수도에 나타난 천문기록 현상이 새겨진 제신홍도관은 현대의 첨단 천문학 기법에 의거해 주나라 무왕이 상왕조를 멸망시킨 연대를 과학적으로 밝혀줄 수 있다. 그것은 상말주초의 세계문화유산급 유물로서 국제학술계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 있다.

더욱이 중국 은주 교체기의 역사적 사실은 우리나라 고대사, 특히 고조선(또는 단군조선)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점에서 홍도관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진지한 연구와 관심이 요구된다.



박종진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