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늑하고 평화로운 닭실마을 전경.
봉화읍 삼계회전교차로에서 문수로를 따라 1km 남짓 가면 고개를 하나 넘어 왼쪽으로 아늑한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송림이 울창하게 우거진 야트막한 동산의 기슭에 수십 채의 한옥 기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평화롭고 정겹게 다가온다. 안동 권씨의 집성촌인 닭실마을로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 속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경주 양동마을, 안동 내앞(川前)마을, 풍산 하회마을과 더불어 이 마을을 삼남의 4대 길지로 꼽았다. 풍수설에 따르면 이 마을은 금닭이 학의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지세라고 한다. 원래는 달실마을이라고 일컬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닭실마을로 바뀌었다. 이곳 주민들은 예전처럼 달실로 불리기를 바라지만 안내판 및 각종 지도 등에는 닭실이라고 적혀 있다.

봉화 닭실마을은 조선 중종 때의 재상인 충재 권벌(1478~1548)의 종택이 이곳에 터를 잡고 제사를 모시면서부터 한과를 만들기 시작하여 500여 년 동안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이곳 한과는 찹쌀 반죽에 멥쌀가루를 입히고 튀겨 조청을 바른 뒤에 강정, 튀밥, 깨 등을 박아 만든다. 이 마을에서는 국내산 재료만을 써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한과를 만들어 옛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명을 얹은 모양이 곱기로도 유명하다. 이곳 부녀회에서는 1992년 생활개선부를 만들고 마을회관에 모여 공동으로 한과를 만드는데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자연석 거북바위 위에 세워진 청암정

이 마을의 고택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충재 권벌의 종택인 솟을대문 집이다. 충재 종택은 소박한 양반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기와를 얹은 돌담장이 한결 운치를 돋운다. 종택을 지나면 권벌이 1526년(중종 21년) 만든 정자인 청암정(靑巖亭)과 만난다.

거북바위 위에 올라서 있는 청암정.
청암정은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워졌으며 냇물을 끌어 연못을 파고 아담한 장대석 돌다리를 놓아 건너다닌다. 물 위에 거북이가 떠 있고 그 위에 정자가 놓인 특이한 모습으로 흡사 작은 섬을 연상시킨다. 정자 안에는 '靑巖水石(청암수석)'이라는 미수 허목(1595~1682)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다. 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위치에 따라 정자의 높이가 각각 다르다. 정자 한쪽의 방에는 온돌 구들이 아니고 마루가 깔려 있는데 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얽혀 있다.

본디 청암정은 온돌방을 갖추고 있었으며 둘레에 연못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온돌방에 불을 넣었더니 기이하게도 바위가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한 승려가 이 바위는 거북이라서 방에 불을 지피는 것은 거북 등에 불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래서 아궁이를 막고 온돌방 대신 마루를 깐 뒤에 주변을 파내고 못을 만들어 거북바위에게 물을 주었다는 것이다.

청암정 앞의 충재박물관(기념관)에는 다양한 문화재 467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 충재일기, 근사록, 우향계축, 심경, 사마방목, 문과잡과방목 등 15종 184책으로 이루어진 권벌 종가 전적은 1986년 11월 29일 보물 896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풍광 빼어난 석천계곡을 굽어보는 석천정사

충재 권벌은 1507년(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에 이르렀으나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로 파직당하고 이곳에 내려와 은거했다. 1533년(중종 28년) 밀양부사로 복직되어 한성부판윤 등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1547년(명종 2년)에 일어난 양재역벽서사건, 즉 정미사화에 연루되어 구례와 삭주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1548년 삭주에서 죽었다. 그 후 선조 때 무죄가 밝혀져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충재 종택의 솟을대문과 돌담장.
청암정 앞에서 석천계곡을 따라 15분 남짓 걸으면 권벌의 맏아들 권동보가 지은 석천정사에 다다른다. 양지 바른 닭실마을의 눈은 거의 다 녹았으나 석천정사로 가는 길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인 채 멀어져가는 겨울을 아쉬워하는 듯하다. 응달진 깊은 계곡인 까닭이다.

권동보(1517~1591)는 1542년(중종 37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삭주로 유배되어 죽자 관직을 버리고 20년 동안 두문불출했다. 선조 때 아버지가 누명을 벗고 복관되었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에 돌아와 석천계곡 위에 석천정사(石泉精舍)를 짓고 산수와 벗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석천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과 정면 2칸 반, 측면 1칸의 건물이 서로 이어진 평면 구조를 하고 있으며 소박하고 고풍스러운 기품이 배어난다. 지붕은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으로 각기 달리 구성되어 있다. 석천정사 아래로 흐르는 석천계곡은 물이 맑고 숲이 울창하여 풍광이 빼어나다. 청암정과 석천계곡 일원은 2009년 12월 9일 명승 제60호로 지정되었다.

■ 여행메모

▲ 찾아가는 길 = 풍기 나들목이나 영주 나들목에서 중앙고속도로를 벗어난 뒤에 영주시-36번 국도-봉화-삼계회전교차로-문수로를 거친다. 대중교통은 봉화에서 닭실마을 입구로 가는 버스를 이용한다.

석천정사 아래의 계곡 풍경.
▲ 맛있는 집 = 순수 혈통 한우에 각종 한약재와 약초를 먹여 키워서 육질이 연하고 성인병 예방에도 효과가 뛰어난 봉화 특산 한약우는 별미 건강식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쇠고기 맛을 좌우하는 올레인산 함량도 매우 높다. 봉화 일원에 한약우 전문점이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봉화에서 울진으로 가는 36번 국도변에 있는 봉화한약우프라자(054-674-3400)가 유명하다.


청암정 앞에 수백 년 된 노송이 서 있다.

글ㆍ사진=신성순 여행작가 sinsatga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