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첫 불을 밝힌 거문도 등대.
동백꽃 빛나는 다도해의 절해고도

고흥 녹동항에서 카페리에 올라 거문도로 간다. 밀폐된 쾌속선에 갇혀 쏜살같이 파도를 헤치던 뱃길과는 사뭇 다르다. 갑판에 나가 바닷바람 맞으며 물살을 가르는 기분이 상쾌하다. 거금도와 금당도 사이의 해협을 통과한 배는 넓은 바다로 나선다. 작은 섬들이 간간이 눈에 들어올 뿐, 탁 트인 남해를 누비다가 2시간 50분만에 거문도에 도착했다. 여수에서 뜨는 쾌속선보다 운항 거리는 절반도 안 되지만 속도가 느려 시간은 더 걸렸다. 하지만 뱃길 여행의 낭만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으니 불만은 없다.

6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여수시 삼산면의 핵심인 거문도는 역사가 꽤 깊은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 시대의 돌검과 고려청자 기름병이 출토되었고, 한나라 무제 원수 4년(기원전 119년)부터 당나라 고조 무덕 4년(서기 621년)까지 700여 년 동안 사용되었던 화폐인 오수전이 발견된 까닭이다.

총면적 12㎢의 거문도는 동도(동도리)와 서도(서도리·덕촌리), 그리고 그 사이에 위치한 고도(거문리)로 이루어졌으며 삼도, 삼산도, 거마도 등으로도 불렸다. 고도는 서도나 동도에 비하면 점 하나 크기밖에 안 되는 작은 섬이지만 행정ㆍ교통ㆍ어업ㆍ문화 시설이 몰려 있는 거문도의 중심지다. 고도에서 서도로 가려면 나룻배를 타야 했으나 1991년 두 섬 사이에 길이 250미터의 삼호교가 놓임으로써 이제는 걸어서 손쉽게 오갈 수 있다.

대문장가가 많아 거문도로 개명

동백 숲길을 걷다가 굽어본 선바위.
거문도로 이름을 바꾼 것은 거문도 사건 때 이곳에 왔던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라고 한다. 정여창이 주민들과 필담을 나누다가 대문장가가 많은 것에 감탄해 거문도(巨文島)로 개명할 것을 조정에 건의했다는 것. 귤은 김유와 만회 김양록 선생이 대표적 학자로 귤은 사당은 동도, 만회 사당은 서도에 있다.

이른바 거문도 사건이란 1885년 4월, 영국이 이 섬을 불법 점거한 사건이다.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은 이곳을 해군기지로 삼으려 했다. 이에 정여창이 항의했으나 영국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고 나서야 1887년 2월, 영국군은 철수한다. 이 기간 중 해밀튼 제독이 이곳을 다녀갔다 해서 서양에서는 거문도를 포트 해밀튼(Port Hamilton)이라 부른다. 또 이때 사망한 영국 해군 묘지가 거문항에서 10여 분 거리인 고도 산중턱에 있다.

거문도는 거문8경이 꼽힐 만큼 낭만 가득한 섬으로 특히 서도 남동쪽 수월산 기슭의 등대 가는 길이 아름답다. 바다 위로 걸린 삼호교를 건너 서도에 올라선 뒤에 왼쪽 길로 접어들어 유림해변을 지난다. 넓은 시멘트 길로 30분쯤 걷다가 잘록하게 패어 들어간 갯바위 지대인 목넘애(목넘어)를 건너면 운치 있는 산길이 시작된다. 수월산(水越山)은 폭풍우가 몰아치면 너비 30∼40미터의 목넘애로 파도가 넘나든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등대 앞으로 펼쳐지는 쪽빛 바다의 절경

목넘애에서 등대까지는 1.2㎞로 온통 동백숲이다. 수월산에 뿌리내린 나무 가운데 70%는 동백이다. 그래서 목넘애 남쪽 지역을 따로 떼어내 동백섬이라 일컫기도 한다는 사실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겨울부터 피어난 동백꽃은 삼사월이면 절정의 향연을 벌인다. 새파란 잎 사이로 꽃망울을 터트린 빨간 동백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발밑에는 목을 꺾고 후두두 떨어진 동백꽃잎이 양탄자처럼 깔려 있다. 해안선을 끼고 드리운 동백 길을 30분쯤 걷노라면 벼랑 아래로 누워 있는 바다가 언뜻언뜻 비치다가 등대가 반긴다.

동백꽃이 수월산의 봄을 장식한다.
거문도 등대는 1905년 첫 불을 밝혔다. 보통 날씨라면 반지름 40㎞ 안에 있는 배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된다. 고유 섬광주기는 15초로 한번은 강하게 다음에는 약하게 불을 밝힌다. 안개가 끼어 가시거리가 500미터에 미치지 않으면 45초마다 5초 동안 나팔을 분다. 70마력의 공기압력을 나팔관에 통과시켜 소리를 내는 무중신호기(霧中信號機)다.

등대 앞 낭떠러지 위의 관백정에 오르면 기막힌 조망이 펼쳐진다. 남으로는 흰 파도가 배치바위를 철썩철썩 때리고 있고, 동북으로는 삼부도가 그림처럼 떠 있으며, 동으로는 멀리 신기루처럼 뿌연 백도가 아스라하다. 하늘보다 더 푸른 쪽빛 바다는 햇살을 머금고, 갓 잡아 팔딱팔딱 뛰는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저녁에 포구 뒤편 횟집으로 들어가 농어를 주문하고 주인장과 함께 술잔을 주고받았다. 자연산이라 유난히 쫄깃쫄깃하고 감칠맛이 난다. 전직 어부였던 횟집 주인은 그물 한번 치면 한 달치 벌이를 했다며 지난날을 그리워한다. 그때만은 못해도 거문도는 여전히 어획량이 넘치는 부자 섬이다. 포구를 빼곡하게 메운 어선들이며, 아침마다 활기 넘치는 공판장이며, 텁수룩한 머리와 수염에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로 분주히 오가면서도 웃음을 머금고 있는 뱃사람들을 보노라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여행 메모

▲ 찾아가는 길

거문도 등대 앞 낭떠러지 위에 세워진 관백정.
여수항에서 거문도행 쾌속선 하루 2회 운항. 2시간 20분 소요. 문의 061-663-0116, 0117.

고흥 녹동항에서 초도 경유 거문도행 카페리 하루 1회 운항(매주 월요일 휴항). 2시간 50분 남짓 소요. 문의 061-843-2300. 844-4358.

▲ 맛있는 집

거문도의 여러 횟집 가운데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곳은 산호횟집(061-665-5802)이다. 참돔, 우럭, 능성어, 농어, 광어 등의 활어회와 전복, 소라, 홍삼, 흑삼 등의 해산물이 신선하며 곁들여 나오는 거문도 특산 해초류도 맛깔스럽다. 얼큰한 매운탕도 좋지만 시원한 맑은탕이 더욱 일품이고, 직접 담근 산더덕주는 향긋하니 주당을 유혹한다. 여름에 가면, 그물이 아니라 낚시(채낚기)로 잡아 상처가 없고 신선도가 뛰어난 갈치회도 맛볼 수 있다.


거문도 사건 때 숨진 영국 해군 묘지.
고도와 서도를 이어주는 삼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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