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혼례와 제사 때 손님에게 건진국시 대접

정릉 ‘봉화묵집’… 제대로 된 건진국시와 제물국시
마포 ‘안동’… 국수와 수준급 수육, 문어숙회
압구정 ‘안동국시’… 30년 업력 남어
인사동 ‘소람’… 묵이나 전도 수준급

국수는 ‘면(麵)’이다. 곡물가루를 물 혹은 물기가 있는 액체로 반죽하여 만든 음식이다. 국수를 복잡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있다. 국수는 대부분의 인류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가장 보편적인 음식이다. 유럽,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파스타’라고 부르며 수백, 수천가지의 국수를 내놓고 있다. 이탈리아의 파스타는 국수와 우리의 수제비 심지어는 만두도 포함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여러 종류의 곡물가루를 이용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만든 국수를 먹는다. 일본, 중국도 마찬가지다. 칼로 자르거나 손으로 늘여서 국수 가락을 만든다.

곡물가루라고 표현한 것도 이유가 있다. 한반도 국수의 원형은 메밀가루였다. 곡물가루도 여러 종류다. 반죽용 재료도 단순하지 않다. 이탈리아 파스타 중에는 계란 노른자위만 사용하는 것도 있다. 우리 국수 중에는 안동의 ‘건진국시’처럼 콩가루를 넣어서 소금물로 반죽하는 경우도 있다.

기록에 남아 있는 홍사면(紅絲麵)같이 생선과 곡물가루를 배합한 것도 있었다. 생선은 신선한 날 새우를 갈아 넣은 것이고 곡물가루는 메밀가루다. 홍사면은, 새우와 더불어 산초(천초, 川椒), 메밀가루, 콩가루 등을 넣고 만든 국수다. 홍만선의 <산림경제>에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만 원전은 <거가필용(居家必用)>이다. <거가필용>은 원나라 때 만든 책이다. 홍만선의 시대보다 500년 이상을 앞선 1천 년 전의 중국 기록이다. 원나라는 해산물이 귀한 몽골족이 세운 중국이다. 이 음식은 중국 혹은 몽골에 영향을 준 아랍 음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국수는 참 복잡한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국수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국수는 하찮은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국수는 동, 서양 모두 귀하게 여긴 음식이었다. 국수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에서도 17∼18세기까지 국수는 귀했다. 파스타 한 그릇을 먹기 위하여 7∼8장의 셔츠가 땀에 젖도록 일해야 한다는 기록도 있다. 그나마 산업혁명 후의 이야기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고운 곡물가루를 얻기 위한 기계가 없었다. 기계가 있어도 전기 동력 등이 없던 시절에는 여전히 고운 곡물가루는 귀했다. 당연히 국수는 귀했다. 오늘날 국수왕국이자 파스타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역시 국수의 역사, 파스타의 번영은 불과 200-300년의 역사다. 이탈리아에서도 파스타는 귀한 음식이었다.

속설, “국수는 장수(長壽)를 의미한다”는 내용도 엉터리다. 장수를 기원한다면 환갑날 국수를 사용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국수=장수’라면 오늘날까지도 경북 안동에서 국수 제사를 모시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국수가 장수를 기원하고 또 장수를 의미한다면 ‘국수 제사’는 도리에 맞지 않다. 세상을 떠나신 조상의 제사상에 장수의 의미를 지닌 음식을 내놓는다는 것은 이야기의 아귀가 맞지 않는다.

유교사회의 음식은 유교적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주요 수단이자 도구였다. 성리학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삶 중 주요 절차인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제대로 치러내는 것이다. 관혼상제 중 혼례와 제사는 이미 그 시기가 정해져 있다. 만들기 힘든 국수를 만들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의미다. 만들기 힘든 국수를 내놓는 이유다. 이와 달리 초상(初喪)은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다. 급작스럽다. 국수 대신 급히 차릴 수 있는 육개장 등을 내놓는다.

한반도에 메밀을 대신할 밀이 유입되고 고운 곡물가루를 얻을 기구들이 생기기 전부터 경북 안동 지방에서는 국수를 만들었고 또 손님상에 내놓았다. 안동지방의 국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만들어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반드시 만들어야 할 음식이기 때문에 만들었다.

‘건진국시’는 국수가락을 만들어서 삶은 다음, 찬물에 냉수처리를 한 것이다. 한차례 건졌다는 뜻에서 ‘건진국시’라고 부른다. 바로 끓여서 먹으면 될 터인데 왜 번거롭게 삶아서 냉수처리한 다음 보관했을까? 일시에 몰려드는 손님맞이에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손님이 올 때마다 국수를 삶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냉수처리한 후 보관하다가 바로 그릇에 담고 육수를 붓고 내는 편이 빠르고 간편하다. 안동의 건진국시가 생긴 이유다. 게다가 한차례 냉수처리를 했으니 국수가 퍽 맑고 깔끔하다.

위치도 찾기 힘든 서울 성북구 정릉2동의 ‘봉화묵집’. 건진국시와 바로 삶아내는 제물국시를 만날 수 있다. 가격은 높지 않지만 반가의 음식이라고 부를 만큼 깔끔하고 음식 맛도 수준급이다.

서울 마포 경찰서 맞은 편 골목의 ‘안동’도 반가의 밥상과 더불어 수준급의 건진국시, 제물국시를 내놓는다. 가늘게 썬 건진국시가 반가의 품위를 보여준다. 수육, 문어숙회 등도 수준급이다.

오래된 안동국시전문점으로 압구정동 ‘안동국시’를 손꼽는다. 30년의 업력을 넘겼다. 인사동의 안동국시전문점 ‘소람’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집이다. 묵이나 전도 수준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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