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사자표춘장’등장으로 짜장면 확산전통 첨면장에 물기 더한 ‘물짜장’ 독특‘신동양’ ‘홍영장’ ‘마마수교’물짜장 유명‘우짜’(우동+짜장) 등 짜장면 변화, 발전 진행 중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경남 통영에는 ‘우짜’라는 음식이 있다 우동과 짜장면이 만났다. 우동, 우동 국물이 있고 위에 짜장이 조금 올라가 있다. 중국에는 없는 음식이다. 한반도에도 이런 음식은 공식적으로는 통영에 있을 뿐이다. 한 그릇에서 짜장면과 우동이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 통영에는 ‘정식 우짜집’이 있다. 간판에도 ‘우짜’라고 적었다.

한반도의 짜장면은 근래 100여 년 동안 급속도로 진화했다. 결론은? 중국 본토에도 없는 희한한 ‘한국형 짜장면’이 나왔다. 청일전쟁 무렵 짜장면이 들어왔다는 표현은 말 그대로처음 한반도에 짜장면이 소개된 것이 그 무렵이라는 뜻이다. 짜장면이 한반도에서 유행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청요릿집이었다. 짜장면은 예나 지금이나 가격이 싼 중국 서민들의 일상식사였다. 고급 청요릿집에 끼어들 틈이 없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짜장면은 대중적으로 확산되지 않는다. 청요릿집의 코스 중의 하나였다.

짜장면의 대중적인 확산은 1950년대부터다. ‘사자표춘장’이 이 무렵 사업을 확장한다. 우리가 ‘춘장’이라고 부르는 중국 첨면장은 ‘한국인의 된장’ 같은 존재다. 크고 작은 업소들이 첨면장을 사용했다. 스스로 장을 만들기도 했지만 인근 화교들을 통하여 장을 공급받기도 했다. 호남의 한식집 중에는 인근의 민가에서 된장, 간장 등을 공급받기도 한다. 식당에서 소비되는 많은 장류를 모든 준비할 수는 없다. 1960∼70년대에는 시골을 돌면서 봄철 남은 장을 모아서 대형 식당에 납품하는 상인들도 있었다. ‘사자표춘장’의 창업주도 인근 화교 민가의 첨면장들을 모아서 자전거로 식당에 납품하는 일을 했다.

공식적으로 1955∼1965년까지 11년 동안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밀가루가 한반도에 대량 공급되었다. 한국전쟁이 진행되고 끝나는 시점인 1953년 무렵에도 밀가루는 일제강점기에 비해서 상당히 흔해졌다. 1955년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된 미국의 밀가루 대량 공급은 끼니가 힘들었던 가난한 한반도의 식량난을 어느 정도 해결했다. 국수공장들이 대거 들어서고 수제비가 가난한 이들의 끼니가 되었다. 중식당에서는 밀가루를 이용한 그들 스타일의 ‘짜장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국수+첨면장’으로 만드는 짜장면. 밀가루가 해결되고 나니, 이번엔 첨면장이 문제였다. 화교 민가에서 모으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가내수공업 식으로 만들어도 공급은 한계가 있었다. 외식을 할 만한 식당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중식당의 짜장면 수요는 급격히 늘어났다. ‘용화장류(영화식품)’는 이런 문제를 ‘사자표춘장’으로 해결했다.

원형 첨면장은 농도가 짙다. 잘 비벼지지 않는다. 지금도 북경 등에서 만나는 짜장면은 뻑뻑해서 비비기가 힘들다. 첨면장의 원래 색깔은 붉은 색이다. 오래 묵히면 색깔이 검어진다. 검은색은 단맛이 나는 검은색 캐러멜색소로 대체했다. 묽게 만드는 것은 식당의 주방에서 해결했다. 전분을 풀고 양파나 감자, 당근, 대파, 호박 등을 썰어 넣었다. 전분, 각종 야채, 캐러멜색소, 각종 감미제, 조미료가 들어간 것이 우리가 오늘날 만나는 짜장면 소스다.

지금은 문을 닫은 전북 익산 ‘국빈반점’의 대표 유비홍씨는 화교2세로 익산에서 50년 쯤 화상 중식당을 운영했다. 아버지는 인천이 아니라 금강유역으로 한반도에 발을 디뎠다. 아들 유씨는 1960년 언저리 아버지로부터 식당을 물려받았다. 인근 농가에서 배달하는 채소는 가격이 쌌다. 밀가루 가격도 쌌다. 외식업체는 드물었다. 중식당의 짜장면은 인기 폭발이었다. 청요릿집 중식당이 짜장면, 탕수육 등을 내놓는 음식점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유씨는 이때 “제법 돈을 많이 벌었다”고 회상한다.

서울 인천 등과는 달리 지방에는 공장 제조 첨면장이 늦게 전해졌다. 화교 중식당들은 이런 공장 제조 첨면장을 거부했다. 물기가 적고 뻑뻑한 첨면장에 물기를 더했다. 지금도 익산, 군산 등지에서 팔고 있는 ‘물짜장’이다. 공장제 된장도 마찬가지. 달고 맛있지만 된장 고유의 맛은 아니다. 밀가루가 80%씩이나 들어간 짝퉁 된장, 간장을 거부하는 한식당도 있다. 마찬가지다. 익산, 군산 일대의 화상 노포들은 짝퉁 첨면장을 거부했다. 스스로 예전 첨면장을 만들고 여기에 물기를 더해서 ‘물짜장’을 만들었다.

‘국빈반점’은 문을 닫았지만 주인 유씨의 친척들은 여전히 중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익산의 ‘신동양’도 유씨의 조카가 운영하는 화상 중식당이다. ‘삼선물짜장’도 있고 한국식으로 진화한 ‘볶음밥+짜장’ 메뉴도 있다.

군산의 ‘홍영장’도 마찬가지. 메뉴판을 보면 청요릿집의 그림자는 남아 있다. 몇몇 중식 요리를 내놓고 탕수육과 물짜장이 주력 메뉴다.

지방에는 여전히 공장제 짝퉁 첨면장, 짜장면을 거부하는 집들이 있었다. 지금은 서울 은평구에서 문을 연 ‘마마수교’도 물짜장을 내놓는 집이다. 이름은 ‘산동짜장’이다. 원형 짜장면이 출발한 산동성의 전통 첨면장을 사용한 짜장면이라는 뜻이다. 경주 기차역 옆에서 오랫동안 원형 짜장면을 고집하던 이가 주인. 지금 ‘마마수교’은 따님이 운영하고 있다.

국수에 첨면장을 얹어서 먹던 짜장면은 공장대량 생산 춘장과 결합하였다. 발전, 진보한 것인지 혹은 퇴보하여 무너진 음식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통영의 ‘우짜’처럼 이제 짜장면은 완전히 한식의 한 종류가 되었다. 한국인들의 ‘빨리빨리 문화’가 짜장면에도 스며들었다. 빨리 비벼서 빨리 먹어야 하는 인스턴트 음식. ‘국민 추억의 음식’인 짜장면이 또 어떻게 변화, 발전할는지 두고 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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