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벚꽃과 연둣빛 신록, 짙푸른 삼나무가 세량지와 어우러졌다.
호수 위로 투영된 곱디고운 수채화

이른 새벽, 갓밝이의 냉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시간임에도 둑 위에 늘어선 많은 눈동자들이 잔잔한 호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어둠이 서서히 걷힐 무렵, 소리 없이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호수를 에워싼 산자락에는 진초록 삼나무와 연둣빛 버들, 연분홍 산벚꽃이 서로 뒤엉켜 오묘한 빛의 향연을 펼친다. 곱디고운 파스텔조의 수채화는 호수 위로 투영되어 또 다른 공간을 빚어낸다. 이렇듯 산과 물이 하나로 어우러져 그림 같은 하모니를 이룬 신비로운 정경은 실로 꿈속에서나 그리던 감동적인 서정시요 서사시가 아닐 수 없다.

이곳은 화순 세량지(細良池). 산벚꽃이 활짝 핀 4월 중순 무렵, 동 트기 전 물안개의 모습은 숨이 턱 막힐 만큼 환상적이다. 갓밝이를 맞아 호수 위로 조금씩 일던 물안개는 햇빛이 시나브로 스며들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그러다가 산등성이 위로 해가 올라오면 어느새 흔적 없이 물러난다. 호수 왼쪽 산기슭에는 몇 기의 묘지가 있지만 그것조차도 아름다운 풍경에 방해물이 되지는 못한다. 봄꽃과 신록의 호위를 받고 있는 저 묘지의 주인공들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유택을 누리고 있는 행운아들이 아닐까?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50곳'으로 선정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세량리의 작은 호수가 이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6년부터. 규모는 아담하지만 잔잔한 호수에 드리운 산벚꽃과 연둣빛 신록, 짙푸른 삼나무가 조화를 이룬 모습이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화사하고 싱그러운 까닭에 사진작가들을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다가 몇 해 전에는 화순군에서 이곳에 공동묘지를 조성한다고 하자 사진동호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거세게 항의를 한 끝에 이를 무산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도시공원으로 지정된 만연저수지.
화순 세량지는 2013년 미국 CNN의 ‘CNN Go'가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50곳' 가운데 하나로 선정하면서 탐방객들의 발길이 부쩍 늘고 있다. 또한 2014년에는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의 후보지로 꼽히기도 했다. 그리하여 산벚꽃과 신록이 어우러진 봄이나 다채로운 빛깔의 단풍이 물드는 가을의 주말 새벽이면 하루 수백 명의 인파가 세량지의 둑인 세량제(細良堤)에 올라 셔터를 누르기에 분주하다.

1969년 준공된 세량제는 흙으로 둑을 쌓은 토언제(土堰堤)로 길이 50미터, 높이 10미터에 이른다. 1395년(조선 태조 4) 남양 홍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마을을 이룬 세량리는 본디 '샘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새암골’로 불려왔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 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한자로 표기하면서 '세량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노송 숲에 에워싸인 고려 고찰 만연사

세량지에서 찬연한 아침을 맞이하고 나서 인근 만연사로 발길을 돌리면 한결 알찬 여정이 된다. 조계산 송광사의 말사인 만연사는 1208년(고려 희종 4) 만연선사(萬淵禪師)가 창건했다. 무등산 원효사에서 수도를 마치고 송광사로 돌아오던 만연은 지금의 만연사 나한전이 있는 골짜기에 이르러 잠시 쉬다가 잠이 들었다. 십육나한이 석가모니불을 모실 역사(役事)를 하는 꿈을 꾸고 깨어났더니, 눈이 내려 사방이 은세계로 덮여 있었으나 그가 잠자던 자리 주변만은 눈이 녹아 김이 나고 있었다. 이를 경이롭게 여긴 만연은 이곳에 토굴을 짓고 수도하다가 만연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1636년(조선 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만연사 승려들이 군중일지(軍中日誌)에 필요한 종이 및 주식·부식 등을 조달하여 나라를 방어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한말에는 당시 국창(國唱)으로 불리던 이동백·이날치 명창이 이곳에서 소리를 닦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모든 건물이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978년부터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 나한전, 명부전, 한산전, 요사채 등이 있을 뿐이어서 규모가 아담하지만 사찰을 두르고 있는 울창한 노송 숲이 산사의 운치를 돋운다.

만연사를 두르고 있는 노송 숲.
문화유물로는 1793년(조선 정조 7) 작품인 길이 821cm, 너비 624cm의 괘불탱(보물 1345호)을 비롯하여 고려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향나무 원목의 삼존불과 시왕상·십육나한상 등의 불상, 1660년(조선 현종 1) 주조된 범종 등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높이 27미터, 둘레 3미터, 수령 약 800년의 전나무는 만연사 창건을 기념하기 위해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이 심었다고 전한다.

만연사로 들어오다가 만나는 만연저수지의 정취도 그윽하다. 2008년 도시공원으로 지정된 만연저수지 둘레에는 나무데크와 지압길이 드리워 있고 정자와 벤치 등도 갖추어 한 바퀴 빙 둘러보며 산책하기에 그만이며 저수지 한가운데서 분수가 솟아올라 운치를 더한다.

#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도로-산월 나들목-광주제2순환도로-효덕 교차로-817번 지방도를 거친다. 칠구재 터널을 빠져나오면 이내 오른쪽으로 세량리 농로가 드리운다. 농로 도중에 만나는 차단기 앞에 차를 세우고 잠시 걷는다. 대중교통은 광주 광천터미널에서 318번 농어촌 버스 이용.

# 맛있는 집

'오메! 인자오셨소'의 흑두부김치찌개.
화순읍내의 오메!인자오셨소(061-371-7722)는 흑두부 요리 전문점으로 유명하다. 화순의 명품인 흑두부는 검은콩으로 만든 두부로 단백질, 불포화지방산, 아미노산 등이 풍부해 각종 성인병 예방과 어린이 성장발육촉진에 효험이 크다고 한다. 흑두부 보쌈에 다양한 두부 요리, 홍어, 피조개, 버섯전과 무침, 단호박, 돌솥밥 등이 따르는 흑두부정식을 비롯하여 흑두부전골, 흑두부김치찌개, 흑두부된장찌개 등을 내며 유황오리를 이용한 전골, 보쌈, 로스구이 등도 인기 있다.



글ㆍ사진=신성순(여행작가) sinsatga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