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옥교 부근의 험상궂은 협곡지대.
포항시 죽장면 상옥리와 영덕군 달산면 옥계리 사이에 파묻힌 하옥리는 지나는 길손에게 아련한 향수와 더불어 정겨움을 안겨주는 아늑한 산마을이다. 간장현과 내연산 향로봉 줄기 사이로 30리나 이어지는 협곡을 따라 띄엄띄엄 나타나는 작은 산촌들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어디 그뿐인가. 이 산간벽지를 흥건히 적시는 하옥계곡의 맑디맑은 옥계수는 세상사에 찌든 정신을 맑게 해주는 청량제 아니런가.

30리 하옥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동쪽 산줄기 너머에 있는 청하골이 신라 고찰 보경사를 찾는 관광객들로 들썩이는 것과 달리 호젓하기에 더욱 좋다. 청하골처럼 화려한 12폭포를 품지 않았을지언정 우리 산수의 은은하면서도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있으니 이 또한 복이 아닐까?

상옥 삼거리에서 3.8㎞. 하옥교(옛 향로교)를 건넌다. 이 주변은 둔세동(遁世洞)이라 불려왔다.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신라 시대에는 400여 가구가 이 깊은 산골짝으로 숨어들어 살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오래 전에 폐허로 변해 이제는 지도에서조차 마을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언제 마을이 없어졌는지 아는 이도 없는 전설의 땅이다. 울울창창한 소나무 밀림이여, 기묘한 수석의 전시장이여, 깎아지른 벼랑 아래로 굽이치는 협곡이여, 처연하리만큼 아름다운 산수만이 남아 자연을 칭송하는구나.

둔세동을 지나 마두밭(馬頭田)으로 접어든다. 건너편 산의 모습이 말머리 같다 해서 그렇게 불린다. 윗마두(상마두)와 아랫마두(하마두)로 나뉜 두 마을이 계곡 건너 산자락에 아늑하게 앉아 있다. 마두밭의 역사는 두 마을에 각각 남은 수령 300여 년의 느티나무 당산목이 말해준다. 최소한 300년은 넘었다는 얘기다.

신비로운 속살 감춰온 덕골

마두교 아래로 흐르는 덕골 초입.
하옥교로부터 3.4㎞, 상옥 삼거리에서 7.2㎞ 남짓한 지점에 마두교가 걸려 있다. 이제 도로에서 벗어나 감탄할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내연산 서쪽 자락의 하옥계곡 지류 가운데 가장 깊고 원시적인 골짜기, 덕골의 비밀스러운 품으로 들어가는 까닭이다. 덕골의 뒷골에는 1970년대 중반까지 다섯 가구의 화전민들이 살았다는 뒷터라는 마을 터가 있고, 앞골에는 아흔아홉 칸 고대광실을 자랑하던 황정마을이 있었다지만 흔적도 남지 않았다. 엽전을 찍었다는 말도 전해지지만 알 수 없다.

한여름 피서객들도 길가에 붙은 하옥계곡 언저리에서만 맴돌 뿐, 덕골을 아는 이는 드물다. 설령 안다 해도 차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기 일쑤다. 그래서 덕골은 신비로운 속살을 감추어왔다. 덕골로 들어서기 전에 약속 하나 하자. 그 깨끗한 속살을 더럽히지 말자고….

각양각색의 바위 사이로 구르는 청정 옥수에 감탄하면서 15분 남짓 계곡 길을 헤치면 두 번째 지류가 갈라진다. 이 지류는 뒷터로 이어지는 뒷골이고 곧장 뻗은 계곡이 덕골 본류인 앞골이다. 뒷골 합수점에서 10분쯤 나아가면 와폭이 보인다. 비스듬히 흐르는 폭포 자체보다는 빽빽한 원시림으로 뒤덮인 협곡 좌우에 수문장처럼 버티고 선 험상궂은 암벽이 위압적이다.

이 일대는 연둣빛 신록의 늦봄과 녹음 짙은 여름도 좋지만 가을 단풍 빛이 기막히게 곱다. 남쪽 지방이지만 설악산과 비슷한 10월 중순 무렵에 단풍이 든다. 이 와폭까지는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으나 이후로는 바위틈을 이리저리 비집고 올라야 하는 등 난코스가 많다. 등산 초심자라면 이 근처에서 쉬다가 되돌아 내려가는 게 안전할 듯싶다.

야영하며 물놀이 즐기기 좋은 아랫배지미

와폭 지대를 지나 50분쯤 오르자 철철 넘쳐흐르던 물길이 거짓말처럼 딱 끊어지면서 계곡이 바싹 말라붙었다. 땅 위를 흐르던 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이런 현상을 복류(伏流)라 한다. 오래 전부터 덕골에는 백암온천 성분과 비슷한 더운물이 솟는다는 말이 전해져왔는데, 혹시 이곳이 그곳 아닐까?

10여 분만에 복류는 끝나고 맑은 물이 다시 반긴다. 계곡은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는 듯하고 길은 더욱 험해진다. 마두교로부터 2시간 30분만에 삼지봉에 올라선다. 삼지봉(711m)은 한동안 내연산 정상으로 알려졌으나 얼마 전 향로봉(930m)에게 내연산 최고봉의 영예를 넘겨주었다.

덕골 어귀 마두교로 내려와 북쪽 길을 따른다. 1.8㎞쯤 달리면 1992년 폐교된 하옥분교 자리에 포항학생수련원이 들어서 있다. 이곳 아랫배지미 일원은 한여름 피서객들이 몰려와 야영하며 물놀이를 즐긴다. 이곳을 지나면 길은 좁다란 비포장도로로 바뀐다. 4㎞쯤 흙길을 헤치면 경방골 어귀로 펜션들이 모여 있는 신교를 지나 옥녀교에 닿는다. 상옥 삼거리로부터 13㎞ 남짓한 이곳에서 하옥계곡은 안녕을 고하고 영덕 옥계계곡에게 바통을 넘긴다.

여행 메모

# 찾아가는 길

중앙고속도로-서안동 나들목-34번 국도-안동-진보-31번 국도-청송-부남-68번 국가지원지방도(국지도)-상옥 삼거리-69번 국지도를 거친다. 안동에서 영덕 방면 34번 국도로 달리다가 신양리에서 69번 국지도를 이용해 옥계를 거쳐도 된다.

대중교통은 포항에서 청하로 가는 시내버스를 이용한 뒤에 하옥리로 가는 버스로 갈아탄다.

# 맛있는 집

덕골 입구에 민박집인 하옥산장(054-262-7885)이 있다. 월월이청청이라는 농가 맛집도 운영하는 곳으로 훈제 오리화덕구이가 별미다. 참나무장작으로 불을 지펴 연기로 통오리를 3시간 남짓 굽는다. 먹는 동안에도 따뜻한 수증기가 나오도록 고안된 도자기 찜기 위에 얹어져 온기가 유지된다. 고두밥과 마늘 등을 넣어 만든 수제 소시지와 돼지목살 화덕구이도 일품이다.



글ㆍ사진=신성순(여행작가) sinsatga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