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식 추탕’ 만드는 방식, 맛 차이나조선시대 추두부탕 원형서 시작통미꾸라지 사용…육수도 달라‘용금옥’ ‘곰보추탕’ ‘형제추어탕’80∼90년 역사 갖가지 사연…옛 영화 사라져

음식, 맛집에 관한 글을 쓰다보면 글 내용과 관련한 ‘항의’를 더러 받는다. “우리는 국산돼지고기를 사용하는데 왜 수입산이라고 썼느냐?” “얼마 전부터 압착탄을 숯불로 바꿨다. 기사를 고쳐달라”는 이야기부터 “조미료를 그 정도 사용하지 않으면 손님들이 찾질 않는다” 혹은 “천연효모 100% 사용하는데 왜 아니라고 하느냐?”는 내용까지, 퍽 다양하다. 외식업체 주인들이 억지를 필 때도 있지만 몇몇 ‘항의성 질문’들은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명백하게 필자의 잘못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홍기녀와 홍기려’에 대한 것이었다. 홍기녀 씨는 서울 무교동(다동) ‘용금옥’을 창업한 이다. 지금의 코오롱 빌딩 자리다. 창업자는 남편 ‘고 신석숭 옹’이지만 실제 운영한 이는 고 홍기녀(洪基女) 씨다. 이걸 착각하여 ‘홍기려’라고 썼으니 항의를 받을 수밖에.

식당 운영, 특히 주방 음식 만지는 일은 홍기녀씨가 도맡았다. 많은 사람들이 “정이 많고 무슨 음식이든 만지면 맛있었고 음식 만지는 손도 컸다”고 이야기한다. 당연히 ‘용금옥’을 드나들던 이들의 기억 속에는 남편과 더불어 늘 홍기녀씨 이야기가 남아 있었을 것이다.

1972년 북한 부수상 박성철이 ‘용금옥의 안부를 물었다’는 내용도 있다. 남북회담을 위하여 서울을 극비 방문한 박성철은 일제강점기 서울(경성)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고향도 경북 경주니 남쪽 사정, 서울 사정에 밝았다. 박성철은 광복 직후 월북했다.

이전인 한국전쟁 협상 회담장에서도 ‘용금옥’은 등장한다. 고려대학교 교수 출신으로 월북, 김일성의 통역관 노릇을 하다가 판문점 회담장에 나타난 김동석이 남측의 기자들을 만났다. “용금옥은 여전한가? 안주인은 잘 계시는가?”라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남측의 신문에 실렸고 그 이후 김동석은 더 이상 회담장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서울식 추어탕(추탕)은 남쪽 농경지역의 추어탕과 다르다. <난호어목지>에 ‘밋구리 죽’이라고 등장하는 남쪽의 추어탕은 ‘된장 푼 물에 미꾸라지를 갈아 넣고 산초가루로 향을 낸 것’이다. 서울식 추탕은 육수부터 화려하다. 소 사골, 양지머리, 내장 등을 사용하고 버섯이나 양파 등 각종 채소를 넣어서 푹 고아서 육수를 만든다. ‘용금옥’ 역시 마찬가지다.

서울식 추어탕은 반가(班家)음식인 셈이다. 오주 이규경이 엮은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음식 레시피나 맛집 책이 아니다. 백과사전인 이 책에 ‘추두부탕’이 등장한다. 추두부탕 끓이는 방법이 상세히 나오고 “반인(泮人)들이 즐겨 먹는다”고 썼다. ‘반인’은 성균관 소속의 노비다. 조선후기에는 이들이 성균관에 쇠고기를 공급하는 일을 도맡아 한다. 오늘날의 혜화동 언저리 물가에 살았으니 ‘반인’이라고 부르고 이들의 마을을 ‘반촌(泮村)’이라 불렀다. 고기 만지는 일을 주로 하니 당연히 천민이었고 ‘반촌’은 평소 관이나 일반인들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특수지역’이었다고 전해진다. 신분제도가 무너지는 조선후기에 이들은 소의 매점매석 등을 통하여 제법 넉넉한 부(富)를 축적하기도 한다. 이들이 먹었던 음식이 바로 추어탕의 원형이라고 보는 추두부탕이었다. 미꾸라지 숙회 형태로 만들어 썰어서 지져낸다. 이걸 넣고 국을 끓일 때 교맥분(蕎麥粉, 메밀가루)을 넣는다고 상세히 기술했다.

서울식 추어탕은 추두부탕을 원형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사뭇 다르다. 반가(班家)의 형태로 바뀐 것이다.

‘형제추어탕’은 1926년, ‘용금옥’ ‘곰보추탕’ 등은 1930년대 초반 문을 열었다. 당시 경성(서울)에는 조선요릿집이나 일본, 청요릿집 등이 성시였고 냉면, 불고기 등을 파는 고급집들이 있었다. 추어탕 집들은 서민들이 술잔을 기울이기 좋은 곳이었다. 지식인들 역시 마찬가지. 결국 광복 후에도 이런 전통이 이어져 문인, 정치인, 기자들의 단골명소가 되었다.

이제 서울식 ‘추탕’은 사라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희망의집’이 있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지고 그 장소도 추정이 불가능하다. ‘형제추어탕’은 원래 이름 ‘형제추탕’이었다. 1930, 40년대에는 대규모 체육대회에 출전했던 사진이 남아 있으나 이미 한차례 문을 닫았다가 장소를 옮겨서 그 맥을 잇고 있다. ‘서울식 추탕’은 미꾸라지 대신 크기가 작고 깔끔한 맛의 ‘미꾸리’를 사용했다고 하나 중국산 미꾸라지, 양식 미꾸라지, 냉동 고등어가 판을 치는 시절에 미꾸리를 찾는 것은 무망하다.

창업자의 며느리가 이어받아 오랫동안 운영해온 ‘곰보추탕’도 예전의 영화는 잊었다. 한때는 ‘곰보추탕’이나 ‘형제추어탕’ 모두 경성의 ‘랜드마크’ 노릇을 했다고 하나 지금의 ‘곰보추탕’은 개천가의 퇴락한 건물에 있는 낡고 작은 가게일 뿐이다.

‘용금옥’은 수주 변영로를 비롯하여 월탄 박종화, 공초 오상순, 팔봉 김기진, 정지용, 구상 선생 등이 단골이었다. 정치인, 기자들도 무수히 드나들었다. 대통령이 한두 번 다녀갔다고 ‘대통령의 맛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당시 대선후보였던 유석 조병옥 박사는 ‘용금옥’에서 추탕을 먹고 수술 차 미국으로 갔다가 현지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유석의 시신이 돌아오던 날, 홍기녀 씨는 ‘용금옥’의 문을 닫아걸고 “(미국으로 수술하러 가기 전)추탕을 두 그릇이나 드시던 분이 그렇게 돌아가신 건 ‘야로’가 있다”며 통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당시의 이야기들을 듣자면, 이집 단골이자 언론인이었던 고 이용상 씨의 “용금옥시대”를 볼 일이다.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