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대학생활을 두 번 했다. 첫 번째는 그 당시 시대상황이 이과 나오면 무조건 앞뒤 돌아보지 않고 공대(工大)를 진학했던 때라 그 시류를 따라 공대에 진학했던 경우고, 두 번째는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어 했던 한의학 공부를 하기 위해서 한의대에 진학한 경우다. 공대 신입생 때부터 학교는 한 번도 데모가 없던 적이 없었고, 도망 다니는 데모주동자를 검거하기 위해서 대학생이라고 짐작되면 수시로 불심검문을 했으며 야간 통행금지도 있었다. 밤 10시만 되면 모든 라디오에서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로 시작되는 귀가 멘트가 나오고 밤 12시가 되면 ‘야간통행금지’가 시행되어 모든 교통수단이 올-스톱되고 그 시간 이후에 움직이려면 경찰서에서 사유를 밝히고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이동이 가능하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터라, 대구 시내 중심부에 있던 내 빈방은 야간 통행금지를 피할 방법이 없던 어설픈 청춘들의 좋은 피난처였다. 대구 중심가에서 술을 먹다가 막차가 끊어져서 갈 곳이 없거나, 집까지 거리가 멀어 통행금지에 걸릴 것 같으면 ?아 드는 곳이었다. 혹간 넉살 좋은 녀석은 아침까지 든든히 챙겨 먹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신입생의 좋은 시절이 끝나기도 전에 10ㆍ26사태가 터지고 “이제는 좋은 시절이 오나 보다” 하고 한 때 데모가 잠잠했다가 12ㆍ12 사태로 신군부가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는 말이 전해지자 이 사실이 촉매가 되어 더욱 격렬하게 데모를 하게 된다. 그러자 데모를 진압하려는 자들이 무수히 많은 경찰과 정보요원을 대학 안에 상주시키면서 문제는 더욱더 복잡하게 얽혀져 갔다. 그 다음해 신군부는 그것만으로는 불길을 잡지 못할 것 같았는지 특히 저항이 극심했던 우리 대학교만 유독 1년간 문을 닫게 했다.

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수십만의 인파가 신군부에 대항하는 데모를 하고 그 연장선상에 5ㆍ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그 중심에는 김영삼ㆍ김대중 양 대통령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별명이 인동초(忍冬草)다. 혹독한 겨울 동(冬)장군을 견디어(忍) 내고 다시 살아나는 풀(草)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많이 자생하며 특히 제주도에 많다. 5∼6월에 꽃이 피기 직전에 채취해서 한약재로 쓰는 것을 금은화(金銀花)라고 하고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건조해서 마르면 그 줄기를 채취해서 쓰는 데 이를 인동등(忍冬藤)이라 한다. 둘 다 겨울을 견디고 자라서 한약의 성미가 겨울을 닮아 차다. 열독(熱毒)에 의해서 종기 같이 빨간 것들이 피부에 솟구쳐 오르거나(瘡瘍), 피부가 부풀어 오른 것은 없지만 여기저기 붉은 색 얼룩이 져 있는 것 같은 단독(丹毒), 피부가 헌데와 부스럼 같은 정절(疔癤) 같은 곳을 치료하는 한약을 통틀어서 청열해독약(淸熱解毒藥)이라고 한다. 열에 의한 독소(毒素)는 한가지 경우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청열약(淸熱藥)과 함께 사용되어야 한다. 열이 끓어 넘치면 청열양혈약(淸熱凉血藥), 열만 치솟아 치성할 때는 청열사화약(淸熱瀉火藥), 습열이 함께 있을 때는 청열조습약(淸熱燥濕藥)을 함께 써야 한다. 청열해독약 중에 적용의 스펙트럼이 가장 넓은 것이 금은화(金銀花)다. 금은화(金銀花)는 성질이 차고(寒), 맛이 달다(甘). 단맛은 모든 작용을 부드럽게 연착륙시킨다고 앞에서 말한 적이 있다. 금은화는 약성이 강하지 않아 인체를 많이 해치지 않으면서도 열독(熱毒)을 잘 없애 주므로 가장 널리 사용된다. 열독에 의해 생긴 창양(瘡瘍) 즉 종기를 없애는 약 중에 제일이다. 이 때는 1첩당 20g정도로 비교적 약량을 많이 사용해야 한다. 금은화(金銀花)는 약의 성미가 가벼워서 인체의 가장 높은 곳인 폐(肺)로 들어가서 폐장(肺臟) 뿐 아니라 폐(肺)가 지배하는 피부(皮膚) 쪽의 열독을 없애주므로 피부의 반진(斑疹)을 없애준다. 이 때는 약량을 10g 정도로 하면 된다. 혈(血)에 열이 많아서(血熱) 혈변(血便)을 볼 때는 새까맣게 태워서 사용한다.(炒炭) 금은화는 주로 포공영(蒲公英), 연교(連翹), 야국화(野菊花), 형개(荊芥), 방풍(防風)과 잘 어울려 논다.



하늘꽃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