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깨어나는 ‘옛길’을 넘다

전통문화 향기 그윽한 선비길

태백산과 속리산 사이의 백두대간을 이어주는 장엄한 연봉인 소백산은 예로부터 신성시되어온 명산으로 삼국시대에는 신라·백제·고구려의 경계를 이루면서 숱한 역사적 애환을 품었으며 이에 따라 수많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소백산의 너른 품안에 살아 숨 쉬는 선조들의 유구한 문화를 느끼면서 그들이 전해주는 옛이야기에 조용히 귀 기울일 수 있는 산책로가 2009년부터 2012년 사이에 드리웠다. 모두 12개의 길로 이루어진 총길이 143㎞의 소백산 자락길이다. 소백산의 열두 자락 가운데 가장 정감 넘치는 곳은 1자락, 즉 첫 자락길이다. 12.6㎞로 4시간 남짓 걸리는 소백산 첫 자락길은 선비길-구곡길-달밭길로 이어진다.

선비길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과 맞닿아 있는 선비촌에서 출발한다. 2004년 9월 문을 연 선비촌은 조선시대의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민속촌으로 영주시의 여러 마을에 흩어져 있던 기와집 7채와 초가집 5채의 본디 모습을 복원한 열두 고택이 핵심을 이루며 정자, 물레방아, 원두막, 대장간 등의 민속시설도 들어섰다.

선비촌에서 시작한 선비길은 단종 복위 사건으로 처형당한 금성대군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제단인 금성단과 순흥향교, 순흥저수지를 지나 2008년 폐교된 순흥초등학교 배점분교(삼괴정)에서 막을 내린다. 길이 3.8㎞로 1시간 남짓 걸리는 선비길은 옛 선비들이 거닐던 길로 지금은 마을길과 들길,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이어져 운치가 떨어지지만 죽계호 또는 송림호라고도 불리는 순흥저수지가 소백 연봉 아래로 드리운 정취가 그윽해 아쉬움을 달랜다.

죽계구곡 선경 따르면 신라고찰 초암사

선비길의 바통을 이어받은 구곡길은 배점분교에서 초암사에 이르는 3.3㎞ 구간으로 좁다란 찻길을 따라 아기자기한 계곡이 숨바꼭질하듯 펼쳐진다. 국망봉 기슭에서 발원한 이 계곡의 본디 이름은 초암골인데 퇴계 이황과 영조 때의 순흥부사였던 신필하가 아홉 굽이의 명소를 골라 죽계구곡이라고 일컬었다. 제1곡부터 제9곡까지 죽계구곡의 이름을 차례로 꼽으면 금당반석, 청운대, 척수대, 용추비폭, 청련동애, 목욕담, 탁영담, 관란대, 이화동인데 1곡은 초암사 바로 위쪽 상류에 있고 나머지는 하류 쪽으로 늘어서 있다.

죽계구곡을 따라 50분가량 오르면 아담한 절집 초암사가 반긴다. 신라 고승 의상대사는 호국사찰을 세우기 위해 명당을 찾아다니다가 산수 좋은 이곳에 초막을 짓고 임시거처로 삼았다. 그 후 명당자리를 발견하고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은 다시 이곳으로 와서 초막 자리에 절을 세우고 초암사라고 불렀다. 이후의 자취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것을 1980년대와 90년대의 중창불사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경내에는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높이 3.5미터의 삼층석탑, 높이 약 2미터의 고려시대 팔각원당형 부도인 동부도와 서부도 등의 유물이 남아 있다.

초암사를 지나 왼쪽 길로 접어들면 비경의 달밭길이 열린다. 초암사에서 달밭재와 달밭골-비로사-삼가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달밭길은 길이 5.5㎞로 2시간 넘게 걸린다. 선비길이나 구곡길과는 달리 제법 경사가 있는 고갯길이다. 초암사에서 달밭골로 넘어가는 길은 오랫동안 출입이 금지되어오다가 영주시가 소백산 자락길을 내면서 비로소 문을 열었다.

원시림과 옥계수 벗 삼은 비경의 달밭길

달밭길로 들어서면 왜 출입금지 구역이었는지 실감하게 된다. 소백산 으뜸의 울창한 원시림과 맑디맑은 옥계수에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한낮에도 어둑어둑할 만큼 하늘을 가린 숲길 옆으로 기암괴석과 부딪히며 씨름하는 계곡물이 철철 넘친다. 촉촉한 습기를 머금은 빽빽한 숲은 시시때때로 밀려들었다가 물러나는 운무로 인해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달밭골은 신라 화랑들이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며 무예를 익히던 곳으로 한국전쟁 이후에는 피난민들이 화전을 일구고 생계를 이어갔다. 여기서 달은 산(山)의 옛말로 산속에서 밭을 일구었다고 해서 달밭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지난해 국립공원 명품마을로 선정된 달밭골에는 여남은 가구가 텃밭을 가꾸고 약초와 산나물을 캐며 자연과 벗해 살아간다.

달밭골의 명물은 산골민박의 누각에 걸린 자유의 종이다. 1968년 영주철도국에서 기증한 것으로 당시 40여 가구가 이곳에 살 때 위급한 상황이나 마을회의를 알리기 위해 치던 종이다. 지금은 자락길 여행자들에게 자유와 평화, 사랑과 희망, 소중한 꿈을 주는 종으로 사랑받고 있다. 자유의 종지기인 산골민박 김진선 씨는 “작고 은은하게 울려 퍼지도록 마음으로 쳐야 영혼이 깨어난다”고 말한다. 힘차게 치면 영혼이 달아난다는 것이다.

달밭골에서 내려와 비로사를 거쳐 삼가 주차장으로 향한다. 신라고찰 비로사는 보물 996호인 석조아미타여래좌상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경상북도유형문화재인 진공대사보법탑비와 영주삼가동석조당간지주 등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의 유물들을 품고 있다.

글ㆍ사진=신성순(여행작가)

# 찾아가는 길

풍기 나들목에서 중앙고속도로를 벗어난 뒤에 부석사 방면으로 가다 보면 소수서원을 지나 선비촌에 닿는다. 영주와 풍기에서 선비촌과 삼가동으로 가는 시내버스 운행.

# 맛있는 집

풍기읍내의 서부냉면(054-636-2457)은 40여년 전통의 평양식 냉면 전문점이다. 직접 맷돌에 갈아서 체로 친 메밀가루로 면을 뽑아 면발이 질기지 않고 뚝뚝 끊길 만큼 부드럽다.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아 달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육수에서는 소고기 향이 은은히 풍긴다. 고명으로는 양지살 편육과 삶은 달걀, 오이가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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