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효종갱’은 ‘술국’ 형태, 해장국으로 발전
조선 효종갱 ‘프리미엄 해장국’ 해석도

1960∼70년대 해장국 대신 ‘술국’으로 불려
‘청진옥’ ‘용문해장국’ 해장국의 기본 형태
‘일등식당’ 수준급… ‘원당헌’화교 해장국

한때 ‘효종갱(曉鐘羹)’이라는 음식이 주목받았던 적이 있다. 아직 방송 프로그램 등에 자주 등장한다. 음식에 얽힌 재미있는 스토리텔링도 있었다. 효종갱은, 최영년(1856-1935년)이 기술한 <해동죽지(海東竹枝)>에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 근거가 있는 셈이다. 효종갱을 재현했다는 집들도 있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허사였다. <해동죽지>에 나오는 효종갱과는 달랐다.

‘효종갱’은 “새벽 종(파루)이 울릴 때 성 안으로 배달하는 국물 음식”이라는 뜻이다. 내용이 상당히 정확하다. 우선 음식을 만드는 곳은 남한산성 언저리다. 쇠고기를 비롯해 여러 가지 해물, 채소 등을 넣고 푹 곤 국물이다. ‘프리미엄 해장국’인 셈이다. 이 국물을 식지 않게 하기 위하여 두터운 솜이불 등으로 잘 동여맨다. 우마가 끄는 마차 등에 실어서 일찍 성문에 도착하여 기다린다. 드디어 새벽종이 울리고 성문이 열리면 성안으로 배달한다.

한양 도성 안의 양반님들이 이 효종갱을 한 그릇 드시고 관청으로 출근을 했다는 이야기다.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숫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부르기에는 근거가 없다. 어떤 집에서 먹었는지, 어느 정도 사람들이 이용했는지에 대한 부연 설명은 없다.

효종갱은 존재했을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한두 명의 식사를 위하여 국을 끓이는 일은 번거롭다. 누가 배달해준다면 먹을 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숫자가 얼마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대략 조선말기, 대한제국,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최영년의 기록이다. 대중적으로 널리 이용한 음식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1894년의 갑오경장은 반상철폐(班常撤廢)를 담았다. 양반, 상민을 가르지 말자는 뜻이다. 신분의 평등이다. 일제강점기에도 반상, 양반과 상민, 천인의 차별은 있었지만 법적으로는 갑오경장을 거치며 반상의 구별은 없어졌다. “이른 새벽 남한산성 언저리의 프리미엄 해장국을 배달해서 먹었던 사람들”은 반가의 후손이든, 반가의 흉내를 내는 사람이든 경제적으로 윤택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설혹 흔하게 있었다 하더라도 한때의 유행 같은 현상이었을 것이다. 더하여 이게 ‘해장국’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해장국의 시작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효종갱을 ‘프리미엄 해장국’으로 내세우는 이들은 일제강점기에도 해장국이 있었다고 믿는다. 그렇지는 않다.

1960, 70년대에도 해장국이라는 이름은 자주 사용되지 않았다. 주로 술국으로 불렀다. 선술집 혹은 실비 집에 가면 주모나 주인이 탁배기 한잔을 내놓는다. 그리고 솥에서 끓고 있는 국을 두어 국자 떠서 그릇에 내온다. 술국이다. 술을 깨기 위하여 먹는 것이 아니라 술을 잘 마시기 위하여 내놓는 음식이다. 이런 국물 음식을 술국으로 불렀다.

해장국을 먹는 사람들은 밤새 일을 했거나 겨울철 이른 새벽 움직이면서 언 몸을 녹일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해장이 필요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시는 경우는 한국전쟁 이후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후기에 많이 등장하는 주막들에는 솥이 몇 개씩 걸려 있다. 혜원 신윤복은 1758년생이다. 영조 시절 태어나서 정조, 순조 시대 초기를 살았다. 조선의 경제상황이 비교적 좋았던 시절이다. 신윤복은 ‘선술집[酒肆擧盃,주사거배]’이라는 그림을 남겼다. 조선시대 선술집의 모습이다. 주모가 있고 술 마시러 온 남자들이 있다. 대여섯 명쯤 된다. 사람들 앞에 큰 무쇠 솥이 두 개 걸려 있다. 이 남자들은 술을 마시러 온 사람이다. 해장하러 온 사람들은 아니다. 술집에는 해장국이 아니라 ‘술국’이 있었다.

지금 만나는 해장국 집의 모델은 서울 종로의 ‘청진옥’일 터다. 한양 도성의 4대문, 4소문 중, 동소문으로 땔감이 들어왔다. 이른 새벽 땔감을 지고 온 이들은 ‘청진옥’ 부근에 나무를 내리고 쓰린 속을 해정, 해장국으로 때웠다. 해장보다는 요기였을 것이다. 탁배기(탁주, 막걸리)도 한잔 곁들였을 것이다. ‘청진옥’은 지금의 자리로 옮길 때도 예전 물건을 죄다 가져왔다.

‘용문해장국’은 서울 용산구 용문동에 있다. 양평 너머 용문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용문해장국’이 양평 언저리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영업시간이 특이하다. 새벽 2시부터 오후 2-3시까지다. 된장 베이스의 해장국이 달고 구수하면서도 담백하다. ‘왕건이’ 뼈에 붙은 고기를 한 덩어리씩 준다. 좋은 된장이 좋은 해장국의 기본임을 보여준다.

서울 망원동의 후미진 골목에는 묘한 이름의 해장국 집이 있다. ‘일등해장국’이다. 오래 전의 ‘도끼다시’ 바닥이다. 이집 메뉴도 재미있다. 메뉴가 해장국 하나인데 메뉴판에는 2개가 적혀 있다. 밥과 더불어 나오는 것은 해장국이고 밥이 빠지고 해장국의 내용물이 충실하면 술국이다. 해장을 하라는 건지 술을 마시라는 건지 헛갈리는 집이다. 음식은 수준급이다. 단골들은 2대 전승 된 후 맛이 변하지 않고 더 좋아졌다고 입을 모은다.

경기도 고양 원당의 ‘원당헌’은 주인이 중국인이다. 감자탕 같은 국물인데 의외로 맑다. 시래기, 우거지 등을 잘 사용한다. 중국 화교가 시래기를 잘 사용하는 것도 놀랍다.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dasani8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