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술국’ 해장국으로 대중화

조선조 ‘금주(禁酒)’정책으로 해장국 희박

술국, 요깃거리 음식이 해장국 대신해

‘옥미식당’ 곰치국, ‘도원촌’ 섭장칼국수

‘섭이네 소구레 국밥집’ 고기와 야채 술국

‘팔우정 해장국’요즘 드문 ‘묵해장국’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해장국 이야기를 하면 어차피 술에 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에는 어떤 해장국이 있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자면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술을 마셨을까, 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야 한다. 앞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조선시대에는 해장국이 없었다”다. 조선시대의 술, 음주문화를 살펴보면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조선은 500년 동안 늘 ‘3가지’를 금했다. 조선 말기에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조선을 유지한 ‘3금(禁)’은 바로 금육(禁肉), 금주(禁酒), 금송(禁松)이다. 조선은 유교적 가치관으로 나라를 세웠고, ‘3금’으로 나라를 유지했다. 조선은 농경국가다. ‘3금’은 농경구가의 유지를 위하여 필수적인 요소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기우제 등을 지내는 방법 이외에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러나 홍수의 경우는 다르다. 산에 나무가 많으면 그나마 홍수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금송, 소나무를 베지 마라는 것은 홍수를 막기 위해서다. 군대에서 사용할 배를 만들 때도 소나무는 필요하고 건물을 지을 때도 소나무는 필요하다. 더하여 홍수 예방도 되니 당연히 금송은 필요한 정책이었다. ‘쇠고기 식육금지’도 농사를 위한 것이다. 소는 식육의 대상이 아니라 농사의 기본이었다. 소의 노동력은 필수적이었다. 당연히 밀도축이나 쇠고기를 먹는 일은 ‘농사를 망치는 것’과 동일했다. 엄한 벌이 따랐다.

금주도 마찬가지. 술을 만들려면 곡물이 필요하다. 곡물이 늘 부족한 국가에서 술을 허용할 리 없다.

계몽군주였던 영조는 특히 술을 절대적으로 금했다. 금주는 영조 내내 비교적 잘 지켜졌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의 금주정책을 상세히 기록했다.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는 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영조의 엄한 금주정책에 대해서 신하들이 반발한다. 신하들이 내놓은 묘책이 바로 ‘중국 사신 방문’이다. 중국 사신을 접대할 때 술이 필요한데 이때는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영조는 당당하게 대답한다. “감주(甘酒)도 술이니 감주를 사용하라” 덧붙여 “아무리 중국 사신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금주정책을 설명하면 이해할 것”이 답한다. 실록의 기록에는 더 이상의 이야기가 없다. 감주는 흔히 ‘단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음료수로 사용하는 것을 술 대신 내놓은 것이다.

신하들이 다시 두 번째 묘책을 내놓는다. “그럼 종묘 제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종묘제례는 국가나 왕실로서는 제일 중요한 행사다. 아마도 술 없이 종묘제례를 모시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조의 대답은 한결같다. “마찬가지다. 술 대신 감주로 대신하라”이다.

덕분에 민간에서도 제사를 모실 때 술 대신 감주를 사용했음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관리 하나가 음주로 잡혀왔다. 영조가 힐난조로 던지는 이야기가 바로 “너는 조상 제사에는 감주를 사용하고 정작 너 자신은 술을 마시느냐?”는 것이다. 영조의 음주 금지는 살벌했다. 지금의 의정부 언저리에서 근무하던 군관이 음주로 목숨을 잃기도 하고, 숱한 관리들이 음주에 휘말려 곤욕을 겪는다.

조선은 숙종, 영조, 정조를 지나면서 경제가 비교적 안정된다.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사람들은 자연히 술을 찾는다. 그러나 영조 치하 53년 동안 금주는 꾸준히 지켜진다. 조선의 금주정책은 정조시절에 슬슬 느슨해지고 순조 대부터 상당 부분 무너진다.

조선시대 중 국가 운영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던 시절에는 오늘날 같은 ‘고주망태’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술 역시 고급인 소주는 귀했고 막걸리 ‘탁배기’ 등이 비교적 흔했다. 당연히 고주망태로 술을 마시는 일 자체가 귀했다.

술이 귀한데 해장국이 흔할 리 없다. <해동죽지>의 프리미엄 해장국 ‘효종갱’은 일제강점기 무렵의 음식일 수 있다. 조선시대 ‘효종갱’을 먹었을 사람은 많지 않다.

해장국은 술로 찌든 몸을 해장시키는 음식이 아니라 가볍게 한잔 하는데 필수적인 ‘술국’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차라리 이른 아침 일을 나서던 사람들이 먹었던 ‘허기를 채우던 음식’일 수도 있다.

강원도 동해안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곰치국이나 섭장칼국수 등이 대표적인 술국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른 아침 부둣가에 나온 어부들이 먹었던 음식이다. 술이 흔해진 지금이야 밤새 술을 퍼마실 수 있지만 해안가에서 일하는 어부들이 지난밤에 술을 과하게 퍼먹었을 리 없다. 조선시대 해안가 사람들의 ‘지나친 음주’는 불가능하다. 빈속으로 이른 아침 바다로 일을 나가면서 허기를 메웠을 것이다.

곰치국은 속초의 ‘옥미식당’을 추천한다. 근래 섭장칼국수는 강릉 등에서 비교적 흔하게 만날 수 있다. 양양의 ‘도원촌’이 널리 알려진 집이다. 육수에는 홍합이 들어가 있다. 메밀칼국수의 고추장이 칼칼하다.

‘수구레’는 소 껍질과 살, 뼈 사이의 아교질을 이르는 표현이다. 경북 예천의 시장 통에는 변형된 수구레 국밥 집이 있다. ‘소구레’라고 표기했다. 수구레 국밥은 경남 창녕 등지에서 유명하다. 예천의 ‘섭이네 소구레 국밥집’은 살코기를 많이 사용하고 배추 우거지를 넉넉하게 넣었다. 시원한 해장국이지만 역시 술국 혹은 요깃거리 음식이다.

‘묵해장국’은 사라진 음식이다. 경주 팔우정 로터리 부근의 ‘팔우정 해장국’에서 묵해장국을 만날 수 있다. 메뉴판에는 ‘해장국’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메밀묵을 채 썰어서 콩나물 등과 내놓는다. 역시 요깃거리 혹은 술을 마시기 위한 술국이다. 속도 든든해지고 시원하다.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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