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과 장(醬)은 한식 밥상의 ‘시작과 끝’

‘밥심’의미…여전히 밥은 한국인의 로망

‘맛있는 밥’은 ‘제철 쌀’로 지은 밥

‘소주한잔’ 숨은맛 비결은 냄비밥

‘가현생고기’밥과 조화된 건강 ‘술국’

‘계림식당’냄비밥 ‘두루담아’ 솥밥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옛말 틀린 것 하나 없다. 한국인은 ‘밥심(밥의 힘)’으로 산다. ‘이밥에 고깃국’은 한국인의 영원한 로망이다. 우리는 1970년대 절대빈곤을 벗어나면서 ‘이밥에 고깃국’을 실현했다. 쌀이 남아돌고 매년 양곡 보관비용만 2천억 원을 넘긴다. 쌀 소비는 급속히 줄어들고 있지만 여전히 밥은 한국인의 로망이다.

우리가 먹는 쌀은 단립미(短粒米), 쟈포니카 종이다. 길이가 짧고 통통하다. 기름기가 많고 당분도 많다. 흔히 ‘아키바레’라고 부른다. 동남아, 중국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쌀은 장립미(長粒米), 인디카 종이다. 오래 전부터 ‘안남미’라고 부르는 쌀로 기름기가 적고 당분도 적다. 밥을 지으면 푸슬푸슬하다. 볶음밥으로 만들면 좋고, 기름기가 적으니 다이어트에 좋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베트남 쌀국수도 장립종으로 만든다.

졸문을 꼼꼼히 잘 읽어주시는 분들 덕분에 ‘이야기가 있는 맛집’이 ‘연재 200회’를 맞았다. 햇수로도 만 4년을 넘겼다. ‘주간지 최장수 맛집 칼럼’이라는 명예도 얻었다. 짧은 재주로 용하다 싶다. 독자들 덕분이다.

나름대로 정한 ‘200회 특집’은 쌀 이야기다. 쌀은 역시 한국인이 살아가는 ‘밥심’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음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늘 ‘맛있는 밥’을 찾는다. “제대로 잘 지은 밥이라면 김치만 있어도 한 그릇 뚝딱”이라고 말한다.

맛있는 밥, 제대로 지은 밥은 어떤 것일까? 역시 ‘제철’을 이기는 쌀과 밥은 없다. 여름부터 9월 초순경까지, 집이나 식당에서 만나는 밥은 고역이다. 아무리 잘 보관했더라도 햅쌀이 나오기 직전의 쌀은 맛이 없다. 쌀이 엉망이니 밥맛이 제대로 날 리 없다. 고슬고슬하기는커녕, 속이 빈 쭉정이 쌀인가 싶을 정도다.

맛있는 밥의 기본은 햅쌀이다. 10월을 넘기면 슬슬 햅쌀이 등장한다. 웬만한 곳에서는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 9월까지는 누가 지어도 맛이 없지만, 10월 하순 정도면 누가 지어도 맛있는 밥이다. 제대로 찬 기운을 쐰 11월 중하순 출하된 쌀이면 더 좋다.

두어해 전, 채널A “착한식당” 팀에서 ‘착한떡집’을 찾을 때의 일이다. 검증 팀은 서울 연희동의 ‘떡의 미학’을 ‘착한떡집’으로 정했다. 식재료부터 만드는 방법까지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제작팀이 떡집에 들어가서 신분을 밝히고 추가 촬영을 부탁했다. 주인이 완강히 거절했다. 촬영거부 이유는 간단했다. 한참 더운 8월이었다. “지금은 모든 곡식이 묵은 것이다. 제대로 된 떡을 만들 수 없다”는 게 거부이유였다. 두어 달 기다렸다가 추석이 지나면 그때 촬영하자고 했다. 제작팀은 진땀을 뺐다.

이제는 사라져가는 냄비 밥은 아주 맛있다. 늦가을 찬기운 쐰 쌀이 나오면 여기저기 냄비 밥 내놓는 곳을 찾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직업상, 지방의 외식업체 벤치마킹 투어가 잦다. 전북 익산의 ‘소주한잔’은 허름한 삼겹살집이다. 이집의 숨은 강자는 냄비 밥이다. 가까운 곳에서 챙겨오는 삼겹살 등 고기도 좋지만, 역시 숨은 맛은 냄비 밥이다.

이탈리아의 리조또(risotto)와 스페인의 빠에야(paella)도 쌀 요리다. 화려한 식재료를 사용하지만 부러워할 것은 없다. 우리처럼 여러 종류의 죽(粥)을 먹는 민족은 드물다.

리조또와 빠에야는 ‘쌀로 만든 서양식 죽’이다. 쌀알이 비교적 탄탄하게 살아 있다. 우리 죽은 쌀알이 흐물흐물하도록 푹 곤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럽의 쌀 요리에는 장립종, 인디카 종을 사용한다. 기름기도 적다. 소화도 쉽다.

우리의 죽은 단립형, 자포니카 종으로 만든다. 기름지다. 평소 밥의 형태로 만들면 된장찌개 등 소화효소가 많은 음식과 더불어 먹어야 한다. 당연히 흐물흐물한 상태로 먹는 것이 좋다. 환자들에게는 미음(米飮)을 권한다. 죽을 고운 체에 걸러서 맑은 부분만 먹기도 한다.

인천 송도 신도시의 삼겹살 전문점 ‘가현생고기’에서는 묘한 형태의 쌀 요리를 만날 수 있다. ‘술밥’이다. 죽인가 싶다가도 마치 리조또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해장국의 원형은 술국이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술을 밤새 퍼마시고, 이른 아침 해장국을 먹을 사람은 드물었다. 술국은 음주를 돕는 국물이었다. ‘술밥’은 술꾼들이 술을 마시면서 요기도 하는 음식이다. 육수에 된장, 잘게 썬 쇠고기, 채소 등을 넣고 푹 끓인다. 여기에 밥을 더한다. 죽보다는 걸쭉하고 리조또보다는 묽은 형태의 음식이 된다. 술을 마실 때 퍼먹으면 자연스럽게 요기도 된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믿는 주인이, 술꾼들의 건강을 생각하면서 만든 음식이다.

냄비 밥은 안동의 ‘계림식당’에서도 만날 수 있다. 잘 지은 밥을 보면 먹느라 바빠서 이집의 냄비 밥 사진은 없다. 늘 다 먹은 후 사진을 찍는다. 빈 냄비만 사진에 덜렁하다.

경기도 여주 외진 산속에 있는 ‘두루담아’는 최근에 문을 열었다. 주방의 외식업 경력은 길다. ‘편하게 한 끼 밥 먹을 수 있는 집’을 생각하고 만들었다. 조금 화려한 ‘밥집’인데, 주방의 음식에 대한 내공이 퍽 깊다. 장(醬)도 잘 사용하지만 냄비 밥 형태의 솥 밥이 맛있다. 미리 예약하면 적당한 온도의 반찬들과 제대로 지은 솥 밥을 만날 수 있다. 잘 지은 밥과 이집의 정갈하고 넉넉한 나물을 비벼먹으면 아주 좋다. 장이나 반찬들이 수준급이다. 푸근한 밥상이다.

한식의 맛은 장이 결정한다. 한식 밥상의 주인은 ‘밥’이다. 밥과 장은 한식 밥상의 시작과 끝이다. 쌀과 밥으로 200회 특집을 갈음한다.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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