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라이프

[이야기가 있는 맛집(202)] 설렁탕(2)

서울(한양)에서 시작된 향토음식

서울 하층민이 주로 운영한 길거리 음식

‘문화옥’ 노포들의 메뉴인 ‘지라’나와

‘마포옥’ ‘한양설농탕’ ‘마포양지설렁탕’ 등

30년 넘은 노포…‘양지설렁탕’ 은 설렁탕의 진화

서울토박이들은 ‘향토음식’을 그리워한다. “지방에는 맛있는 음식이 많은데 서울에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서울에는 향토음식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설렁탕은 서울에서 시작된 향토음식 중 하나”라고 대답한다.

음식이 외식업체의 메뉴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식재료와 소비자다. 식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어야 음식을 만든다. 바닷가에 횟집이 많고 내륙 산악 지대에 산채전문점이 많은 이치다. 교통이 발달한 이즈음도 생산 현지라야 좋은 식재료를 구하기 쉽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잘 만들어도 사먹을 사람이 없으면 그 음식은 사라진다. 어복쟁반이나 신선로 등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다. 소비자들이 찾지 않으면 만들고 파는 이들도 그 메뉴를 버린다.

조선 후기, 일제강점기에는 식재료를 구하는 일이 무엇보다 힘들었다. 국가의 쇠고기 식육 금지 정책은 느슨해졌거나 없어졌다. 쇠고기도 비교적 흔해졌으나 여전히 비쌌다. 설렁탕은 소의 부산물로 만든다. 쇠고기를 소비하는 곳, 소의 도축이 잦은 곳에서 설렁탕이 가능하다. 소의 도축을 막았을 때는 궁궐, 반가, 지방 관청, 중국과의 통로인 황해도, 평안도 일대 등에서 비교적 쉽게 쇠고기를 만날 수 있었다. 궁궐이 있고, 반가(班家)가 있으며 관청이 많은 곳은 한양이다. 더하여 상업의 발달도 한양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쇠고기 소비자 혹은 소 부산물로 만든 음식을 소비할 수 있는 곳도 바로 한양(서울)이다. 설렁탕이 서울에서 시작된 이유다.

하재 지규식은 분원(盆院)을 운영했던 이다. 갑오경장을 통해 조선의 신분체계는 ‘공식적으로’ 무너진다. 반상의 구별이 없어진 것이다. 예전에 분원에서 일하던 하층민 지규식은 정부로부터 분원을 분양받아 ‘자영업자’가 된다. 하층민이 재산을 가지고 자신의 사업을 운영하게 된 것이다. 분원은 그릇을 굽던 곳이다.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지규식이 남긴 일기가 바로 <하재일기>다. 이 일기에서 지규식은 몇 가지 음식을 이야기한다. 그중 군데군데 “냉면과 설렁탕을 사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냉면은 반가의 음식이다. 국수 자체가 워낙 귀하던 시절이다. 밀가루가 귀하니 메밀가루에 전분을 더하여 국수를 만들었다. 이걸 차게 해서 먹으면 냉면이다. 냉면이든 온면이든 국수 음식은 만들기 번거롭다. 이런 음식을 먹는 이들은 반가이거나 조선 말기의 부호들이다. 다산 정약용이 냉면을 먹고 시를 남긴 곳도 황해도 반가, 고위직 관리의 집이었다.

이에 비해 설렁탕은 길거리 음식에서 시작된다. 조선 초, 중기에도 설렁탕은 전국적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귀한 소의 부산물을 버렸을 리는 없었다. 이름도 없이 존재했을 것이다. 설렁탕이 ‘서울의 음식’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서울(한양, 경성)이 쇠고기 소비량이 많다, 따라서 소 부산물도 구하기 싶다. 소비자들도 많다. 설렁탕은 서울에서 ‘길거리 주막 등의 음식’으로 자리매김한다.

지규식은 하층민 출신이다. 냉면이든 설렁탕이든 가릴 것이 없다. 일부 ‘양반입네’ 하는 이들은 여전히 설렁탕을 꺼렸다. 만드는 이들이나 먹는 이들이 모두 하층민 혹은 상민 출신이다. 이들과 겸상(?)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상 위에 고춧가루, 파, 소금 등이 있는 것도 부담스럽다. 소금을 상 위에 두는 것은 그리 오래된 풍습이 아니다. 우리는 소금 대신 간장을 사용했다.

1930년대 종로에서 설렁탕 집을 운영하던 이는 진주에서 ‘형평사’ 운동을 하던 이였다. 이 사람이 당시의 신문기사에 오르내린 것은 ‘아이들의 입학 문제’였다. 형평사는 1920년대 초반 진주에서 시작된 평등(형평)을 주창하는 사회주의 단체였다. 주체세력은 백정(白丁). ‘공식적인 신분철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분 차별은 살아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려고 하니 상민(常民)들이 반대한다”는 것이 이 ‘설렁탕 집 주인’의 하소연이었다. 설렁탕 집은 여전히 하층민이 주로 운영한 길거리 음식점이었다.

설렁탕은, 등장한 후 오래지 않아,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다. 일본인들이 설렁탕의 효능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 설렁탕 국물을 ‘육즙(肉汁)’으로 여기고, “이걸 먹고 조선 사람들이 튼튼해진다”는 표현도 나온다. 일본 만화가는 당시 경성(서울)에서 주목받던 설렁탕 끓이는 모습을 만화로 남기기도 한다. 소 한 마리를 넣고 푹 고는 장면이 등장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배달음식으로도 주목받았다. 설렁탕은 냉면과 더불어 주요한 배달음식이었다. 설렁탕 배달에 관한 묘사가 신문기사에 실리기도 한다.

서울 을지로의 ‘문화옥’은 일제강점기에 문을 연 노포들의 음식과 흡사하다. 노포들의 메뉴 중 하나인 ‘지라’가 이 집에도 있다. 노포들의 메뉴인 ‘만하’ ‘마나’가 바로 소의 지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필이면 유명한 ‘우래옥’ 옆에 있어서 가려졌지만 내공 있는 노포다. 마포는 한때 교통의 요지였다. 한강으로 들어온 물자들이 마포에서 서울로 들어왔다. 전철의 종점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서민들의 음식이 자리 잡았다. 마포에서 여러 가지 외식업체의 음식들이 등장한 이유다.

‘마포옥’ ‘한양설농탕’ ‘마포양지설렁탕’ 등이 마포 지역의 노포들이다. 최소 30년을 넘긴 집들이다. 이중 ‘마포양지설렁탕’은 뼈 국물이 원칙인 설렁탕에 양지고기 삶은 고기 국물을 더했다. 이름도 ‘양지설렁탕’이다. 설렁탕의 진화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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