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용도의 묵은 우리 민족만의 음식

외국에도 묵 비슷한 음식…다양한 식재료, 식사용 묵은 우리나라 뿐

‘가난해서 먹었다’는 속설 사실 아냐…조선시대 기록에 자주 묵 요리 등장

‘봉화묵집’ 메밀묵 주메뉴, 경북 북부ㆍ강원도 산골 ‘묵밥’ 제대로

‘통명정통묵집’묵 수준급, 탕평채 서민 버전인 ‘태평추’맛볼 수 있어

‘순흥묵밥’메밀묵에 양념, 좁쌀 섞인 밥… ‘까치구멍집’ 원형에 가까운 탕평채

묵은 우리 민족만의 음식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음식이다. 일본은 양갱으로 유명하다. 중국 음식에도 마치 일본의 양갱이나 한국의 묵 같은 음식들이 더러 있다. 서양에도 묵과 비슷한 음식은 있다. 그러나 우리처럼 다양한 식재료들을 묵으로 만든 경우 혹은 묵을 식사용으로 사용한 경우는 흔치 않다. 우리는 도토리, 메밀, 옥수수 등을 모두 묵으로 만들어 먹었다. 밤으로 만든 묵도 있고, 해조류를 이용하여 묵을 만들기도 했다. 그중 가장 흔하고 널리 사용된 것은 도토리와 메밀이었다.

조선시대, 흉년이 들면 조정에서는 ‘구황경차관(救荒敬差官)’을 보낸다. 흉년을 대비하여 중앙에서 지방으로 보내는 임시직 공무원이다. ‘진휼관(賑恤官)’ 혹은 진휼사라고도 부른다. 모두 흉년, 기근 등을 구제하기 위하여 보내는 관리의 이름이다. 이들이 늘 살펴보는 것은 도토리(상수리)와 메밀이다.

왕조실록 태종 9년(1409년) 3월의 기록은 참혹하다. 강원도관찰사 상소는 “굶주린 백성이 도토리로 연명하는데 도토리가 다 없어졌고 저장한 곡식도 없다”는 내용이다. 도토리가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다 주웠기 때문이다.

불과 100년이 흐르지 않은 성종 3년(1472년) 4월의 기록에는 좀 더 상세한 ‘도토리 활용법’이 나타난다. 중앙정부나 지방관청은 흉년 대비용 곡식 혹은 도토리, 메밀 등이 있었다. 원래 춘궁기인 봄에 상수리를 나눠주고 가을에는 곡식으로 거두었다.

성종은 해당부서인 호조에 명한다. “원래 가을에 곡식으로 받았으나 가뭄이 심하니 올 가을에는 곡식 받는 일을 하지 말라. 그리고 앞으로도 봄에 도토리 나눠주기만 하고 가을에 곡식 받는 일을 금지하라”는 내용이다.

“우리는 너무 가난했으니 산나물 들나물을 다 먹고, 도토리 등도 먹었다”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지는 않다. 유럽의 중세는 더 참혹했다. 한반도 인근인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 어느 나라나 이 시대엔 굶어 죽는 이들이 많았다. 유럽의 소빙하기에는 몇 백만 명의 사람들이 기근, 전염병으로 죽었다. 아일랜드 인들의 대규모 미국 이민은 감자 전염병으로 인한 감자농사의 흉작, 전염병으로 인한 대규모 사망자 발생으로 시작되었다. 아일랜드에서 굶거나 전염병으로 죽는 것보다는 위험한 대서양 횡단, 미국 이민을 택한 것이다.

조선시대 요리 관련 서적들 혹은 각종 기록에는 묵과 국수 만드는 법이 자주 나타난다. 도토리묵, 메밀묵등이 자주 나타나고 메밀묵의 경우, 제사 음식에도 이용되었다. 기록에는 민간에서는 소나무 껍질과 더불어 도토리도 먹었다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도토리와 메밀을 구황식품으로만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메밀의 경우 반가에서도 묵 혹은 국수 모양을 낸 음식으로 사용하였고, 일상의 생활 혹은 손님 접대에도 사용하였다. 특히 군대의 보급 식량으로 메밀을 보내기도 하고, 위급 시 사용할 도토리를 확보한 경우도 잦았다.

최근에는 묵이 다이어트 식품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묵은 녹말 성분으로 만든다. 녹말 성분, 전분은 맛이 없기 때문에 양념을 첨가하여 먹는다. 열량이 낮은 음식이기 때문에 포만감을 느껴도 섭취 열량은 낮다.

도토리는 귀한 식재료가 되었다. ‘다람쥐의 먹이인 도토리를 줍지 말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인건비 부담으로 도토리 값은 상당히 높아졌다. 중국산 도토리가 흔해지면서 제대로 만든 묵을 만나기도 힘들어졌다.

성북동의 ‘봉화묵집’은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찾기 힘든 장소에 있다. 좁은 골목길을 올라가면 자그마한 슬레이트 지붕의 식당이 나타난다. 경북 봉화 출신의 나이든 분들이 운영한다. 이름이 묵집이다. 메밀묵을 주 메뉴로 시작한 식당이다. 최근에는 안동 건진 국시와 칼국수 류가 제대로인 식당으로 유명세를 탔다. 원래는 묵을 제대로 내놓는 집이다. 경북 북부, 강원도 산골의 ‘묵밥’이 제대로다.

묵은 탕평채의 주요 식재료다. 여러 종류의 나물들을 사용하지만 탕평채의 주요 재료는 도토리 묵 혹은 메밀묵이다. 그나마 메밀이 구하기 쉬우지 메밀묵이 흔해졌다.

경북 예천에는 탕평채와 닮은 음식이 흔하다. 그중 ‘통명정통묵집’을 권한다. 유명하지도 대단한 맛을 자랑하는 집은 아니다. 묵은 수준급이다. 예천 지방에서는 탕평채와 닮은 음식을 ‘태평추’라고 부른다. 탕평채가 반가의 음식이라면 ‘태평추’는 서민 버전이다. 도토리묵이나 메밀묵을 넣고 김치, 돼지고기 등을 더한 다음, 전골 식으로 끓인 것이다. 겨울철이 제철이다.

묵을 찾는 이들은 반드시 영주 ‘순흥묵밥’을 추천한다. 겨울은 메밀 맛이 좋은 계절이다. ‘순흥묵밥’은 메밀묵에 양념을 하고 좁쌀이 섞인 밥을 내놓는다. 묵을 먼저 먹고 밥을 더한 다음 요기를 하는 식이다. 이집에서는 수준급의 두부도 만날 수 있다. 별 모양새 없이 내놓는 시골두부가 아주 좋다.

경북 안동의 ‘까치구멍집’에서는 비교적 정확한 탕평채를 만날 수 있다. 계란지단과 더불어 몇몇 나물이 나온다. 당근이나 미나리 등을 사용하여 색깔도 곱다. 그릇 밑바닥에 묵이 숨어 있다. 원형과 가까운 탕평채인 셈이다. 탕평채의 기본 식재료는 묵이다.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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