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인생”… “요리사는 체력, 끊임없는 도전정신, 사력 다하는 F1 레이서”

일본ㆍ런던ㆍ뉴욕 등에서 요리 내공 다져, 2000년 초 한국에 정착

영국 호텔에서 엘리자베스 여왕 참석하는 파티의 음식 만들어

한국 부인 만나 한국생활 10년 넘어…칼럼ㆍ인터뷰ㆍ방송출연 통해 ‘음식’이야기

“음식은 종합예술”…제자 양성 위해 ‘오키친’열어

이 사내, 심상치 않다

이 사내 결코 심상치 않다. 1949년 생. 예순여덟. 은퇴할 나이다. 사는 곳을 옮긴다? 힘들다. 인생살이? 일흔에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무리다. 변화? 어렵다. 게다가 외국이다. 그는 한국에 사는 일본인이다.

그런데, 이 사내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새로운 일이 있으면 도전할 것 같다. 작은 바람이라도 불면 불쑥 떠날 것 같다. 요나구니 스스무(与那国 進). ‘오키친’ 대표.

이 사내, 참 심상치 않다.

나는 도쿄로 간다!

참 많은 나라, 숱한 도시를 떠돌아다녔다는 생각이 든다. 방랑벽? 그것도 아니다. 떠돌아다녔지만, 무책임하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도전’했고 뭔가를 이루었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일본 오키나와 출생. 19살, 생물학과에 입학했다. 재미가 없었다. 따분했다. 교수들을 보면서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땡땡이를 쳤다. 출석일자 부족, 학점미달로 경고. 그 지겨운 ‘1학년’을 다시 다닐 판이었다. 막연하게 공부보다는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전기, 전화 관련 회사를 운영했다. 아버지와 의견 불일치. “학교 그만두고 여행을 하겠다”는 아들의 고집과 “그렇다면 모든 경비를 네가 준비하라”는 아버지의 경고가 맞붙었다. 친구 집을 며칠 떠돌다가 도쿄로 건너갔다. 학교는 그 길로 접었다. 대학 1년 중퇴.

호주머니에는 3800엔이 있었다. 잠잘 곳은커녕 끼니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공원과 신주쿠 전철역에서 잤다. 그러면서도 “나는 거지는 아니다”고 생각했다.

매일 한 끼만 먹었다. 100엔짜리 ‘고래고기덮밥’. 1주일 정도 지나니 슬슬 돈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굶어야 한다. 거지도 싫고 노동을 하기는 더 싫었다. 참 만화 같은 생각을 했다. “시를 써서 팔자. 시를 판 돈으로 음식을 사먹자”

시를 썼다. 덜렁 그의 시를 사는 사람은 없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세상을 너무 쉽게 봤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의 도움을 얻어 오키나와로 돌아갈까, 라는 생각도 했다.

만화 같은 일이 일어났다. 길을 가던 여고생 4명이 그에게 물었다. “시를 얼마나 팔았어요”라고. 못 팔았다고 답했더니 1시간 후, 그들이 다시 돌아왔다. 오니기리(일본 주먹밥)를 들고. 19살 젊은 아이와 여고생의 대화를 보고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거짓말 같이 시가 팔리기 시작했다. 한 달 정도 지나고 어느 정도 돈이 모였을 때 그는 다시 길을 떠났다. 마치 만화 주인공같이. 2년의 일본 전국일주. 아오모리를 지나 홋카이도까지 갔다. 삿포로에서도 마찬가지. 공원에서 자고,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깡패도 만났다. 그 깡패의 도움으로 매일 포장마차에서 라멘 한 그릇을 공짜로 얻어먹는 ‘행운’도 누렸다.

일본 전국을 돌고 다시 도쿄로 돌아왔다. 술집 웨이터도 하고 이런저런 험한 일도 했다. 운 좋게 다시 얼마간의 돈을 모았다.

가자, 런던으로!

“비행기 표는 어렵게 구했는데 여전히 호주머니 돈은 없었어요.”

도쿄에 머물 때 결심했다. “이제 일본을 떠나자”. 그래서 비행기 표를 구했고 런던으로 향했다. 호주머니에는 19 파운드가 있었다. 런던에서 히치하이크를 했는데 하필이면 스코틀랜드로 가는 차였다. 내린 곳이 에든버러. 1971년, 요나구니씨 나이 23세였다. 다시 공원에서 자고, 바케트 빵과 물만 먹고 살았다.

공원 쓰레기통에서 신문을 뒤졌다. 신문 한 귀퉁이의 구인광고를 보고 무턱대고 전화를 했다. 하필이면 런던이었다. 에든버러에서 런던이라니. 일거리는 식당 설거지였다. 다시 런던으로, 그리고 또 공원에서 자는 일이 시작되었다. 잠자리가 에든버러공원에서 런던 센트럴파크공원으로 바뀌었다.

공원에서 자고 악착같이 일에 매달렸다. 매일 매니저의 개를 산책시키고, 호텔주방의 야근은 도맡아 했다. 매일 오버타임(overtime)을 하는 그가 윗사람의 눈에 띄는 것은 당연했다. 설거지 담당일 때 주방에서 일하던 외국인이 가스사고로 다쳤다. 그는 어렵게 그 자리를 차지했다. 행운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기회가 오면 야무지게 잡았다. 남보다 몇 배의 노력을 했고 불가능한 작업도 해치웠다. 20년 이상 생선을 만진 요리사. 아무에게도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주지 않았던 그가 낯 모르는 동양인에게 ‘비법’을 전수했다.

처음 일한 호텔의 주방장이 유명한 사보이(SAVOY)호텔의 주방 친구에게 소개했다. 사보이호텔의 주방장이 유명한 그로스버너(GROSVENOR)호텔의 주방장에게 요나구니씨를 소개했다. 요리사만 100명, 2000명이 모이는 파티를 쉽게 치러내는 곳이었다. “요나구니씨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참석하는 파티의 음식을 만들었다”는 말을 듣게 한 곳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본토 영국인 조리사들이 즐비한 곳에서 그는 ‘동양에서 온 악착 같은 요리사’로 이름을 얻었다.

일본? 뉴욕으로 간다!

이제 일본으로 돌아가자, 라고 생각했다. 정식으로 요리사가 되었으니 일본으로 돌아가면 어디라도 취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으로 가기 전, 잠깐 뉴욕에 들르자는 것은 스스로를 위한 ‘휴가’였다. 3개월 정도 뉴욕 관광이나 하자는 생각이었다.

잠깐 들렀던 뉴욕. 그 ‘3개월’이 결국 20년이 되었다.

“아무래도 요리사니까 레스토랑에 관심이 있지요. 뉴욕 거리에서 아주 작고 예쁜 레스토랑을 발견하고 들어갔다가 발목이 잡혔지요.”

누가 발목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어, 이거 재미있는 걸. 이건 배워볼 만한 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뉴욕에 머물기로 결심했다. 역시 뉴욕은 만만치 않았다.

공원에서 자는 일은 없었지만 여전히 고달픈 삶이었다. “일본 사람은 절대 못한다. 며칠이나, 얼마나 할는지 보자”는 주방의 텃세도 다 겪었다. 주방의 각 파트 파트를 매일 바꿔 가면서 도는 일도 겪었다.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밑 준비부터 음식 만드는 일까지 혼자서 하는 일도 겪었다. 경력자로서 할 일은 아니었지만 묵묵히 해냈다. “나도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요나구니 잘 하는 걸!”이라는 다른 이의 말을 들어야 했다.

얼마간 세월이 흐르고, 제법 경력이 붙으니 주방장으로 일할 기회가 찾아왔다.

“뉴욕생활 20년이 넘었는데 단 한 번도 취업하려고 이력서를 낸 적이 없습니다. 늘 주변의 소개로 레스토랑을 옮겨 다녔지요.”

인정을 받고 난 후, 마치 ‘떠돌이 무사’처럼 살기도 했다. 월급이 아닌, 조건이 붙어 있는 상여금 같은 급료였다. ‘뉴욕타임스’에서 호평 즉, ‘별’을 받는 조건으로 급료를 받았다. 한 달 만에 레스토랑의 ‘별’을 받게 해주고, 떠난 적도 있었다.

1990년, 한국에서 온 오정미씨를 만났다. 음식과 그릇, 전시회, 조리학교, 푸드 스타일링 등을 통해 두 사람은 연인이자 동료 그리고 부부가 되었다. 주방 일을 해서 돈이 얼마간 모이면 배우고 싶은 분야의 공부를 하는 식의, 떠돌이 아닌 떠돌이 생활도 했다. 오정미씨는 한국에, 요나구니씨는 이탈리아에 있는 사이 뉴욕의 살림집이 몽땅 도둑에게 털리는 일도 겪었다.

‘필연 같은 우연’으로 한국으로 향했다. 이제 한국생활도 10년을 넘긴다. 그동안 많은 칼럼, 인터뷰, 방송출연을 통해 ‘음식’을 이야기했다. 많은 일을 해냈지만, 여전히 부자는 아니다. 작은 집에 살고 자동차도 없다. 욕심도 없다. 해낸 일들이 많았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여전히 많을 뿐이다.

“음식은 종합예술입니다. 음식, 그릇, 테이블세팅, 각종 색채에 대한 감각, 스타일링, 실내 분위기까지 다 챙겨야지요. 젊은 요리사 지망생들에게 음식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치고 싶습니다.”

가회동에서 시작한 ‘오키친’은 요나구니씨가 제자들을 위해서 문을 연 공간이다. 이태원, 광화문을 거쳐, 여의도까지 ‘오키친’은 이어지고 있다.

그에게 언제까지 한국에 머물지는 묻지 않았다. 언제든지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있다. 요나구니씨 스스로도 모를 일이다. 인터뷰 도중 그가 말했다. “요리사는 자동차 경주 F1의 레이서 같다”고. 체력과 끊임없는 도전정신, 그리고 세계를 떠돌며 사력을 다해 경쟁하는 레이서. 다른 곳에서 ‘음식 F1’이 열리면 그는 또 떠날 것이다.

대신, 물었다. “당신에게 음식은 무엇인가? ‘오키친’의 음식은 양식인가? 퓨전인가?” 그가 답했다. “음식은 인생이다. ‘오키친’의 음식은 요나구니의 인생을 담은 것이다.”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가볼만한 이탈리안 혹은 ‘자신만의 음식’을 내놓는 곳>

‘로칸다몽로’는 이탈리안일까? 그렇지 않다. ‘로칸다몽로’는 박찬일 세프의 음식을 내놓는 곳이다. 재료 선택도 자유롭고 조리법도 박찬일 세프 식이다. 식사와 술이 동시에 가능하다. 서울 마포구.

양재동 ‘이안스’는 김이안 세프의 음식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탈리아 풍이라고 하지만 김이안 세프만의 음식을 내놓고 있다. “김이안 세프의 음식을 내놓는다”고 ‘이안스’다. 술과 음식이 동시에 가능하다. 서울 서초구.

해방촌 ‘노아’는 식사하기 좋은 곳. 젊은 세프의 소박하면서도 독창적인 음식들이 돋보인다. 피자와 파스타가 아주 좋다. 서울 용산구.

제주도 ‘르씨엘비’는 제주, 프랑스 음식, 이탈리아 음식이 만난 곳이다. 제주산 돼지고기, 해산물 등에 제주 출신 세프의 정갈한 솜씨를 더했다. 역시 ‘르씨엘비’만의 음식이다. 제주시 애월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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