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연 ‘우리집’ 물려받아 30여년 운영… 최고의 ‘백반’ 중 하나

고모의 ‘무허가 밥집’에서 시작…강화도에서 ‘맛집’으로 소문나

고모 일 돕던 방영순씨 1980년 초부터 물려받아 ‘우리옥’운영

‘백반’ 에 비지찌개, 순무김치, 조개젓갈, 콩나물국 등 큰 변화 없어

日 요나구니 스스무 “각 반찬이 코스요리…한국에서 본 최고 밥상 중 하나”

“우리 집에서 밥 먹자”

1953년 한국전쟁 종전. 전쟁이 끝났다. 전쟁은 위험하다. 누구나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들을 겪는다. 종전. 위험한 순간들은 지났지만 이젠 전후의 배고픔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화도도 마찬가지였다. 가까운 바다 건너에서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전쟁의 위험이나 전후의 배고픔은 다른 지역보다 오히려 더 심했다.

논밭으로 일을 나가는 사람들은 그나마 음식을 챙겨 먹을 수 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끼니를 잇는다. 문제는 직장으로 일을 나가는 사람이다. 직장이라고 해봐야 지역의 작은 관청들이다. 군청, 문화원 등이 고작이다. 집이 가까우면 점심시간에 슬쩍 나가서 식사를 하고 오면 된다. 문제는 집이 먼 사람들이다. 어쩔 수 없이 관청 바깥으로 나가서 저자거리에서 밥을 ‘사먹어야’ 한다. 마땅치 않다.

강화도 ‘우리옥’의 주인 방영순씨의 이야기다. 1942년 생. ‘우리옥’을 40년 가까이 운영하고 있다.

“내가 ‘우리옥’을 세운 건 아니고 1953년에 고모님이 세웠어. 처음엔 식당 이름도 없었고, 말하자면 무허가였겠지. 전쟁 직후라서 행정도 어수선했으니 그까짓 시장 통의 식당을 두고 등록을 하든 말든 따지지도 않았겠지.”

지금의 주인 방영순씨에게는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고모님이 있었다. 방숙자씨. 방영순씨가 어린 시절, 고모님은 한 집에서 같이 살았다. 다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당장 입에 넣을 밥이 없었다. 다행히도 고모님은 음식 솜씨가 좋았다.

“고모님은 당시로서는 엘리트였다. 박문여고를 졸업하고 우리 집에 사셨는데 아마도 살림이 어려우니 음식 가게를 낼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방영순씨를 비롯한 올망졸망한 어린 조카들을 보면서 ‘고모’는 “음식점을 내서라도 살림의 보탬이 되자”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모님은 작은 ‘무허가 밥집’을 냈다. 인근의 관청 직원들이 주 고객이었다. 다행히 문화원장의 부인과 친한 사이여서 강화문화원 직원들이 단골로 드나들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등장한 표현이 바로 ‘우리 집’이었다. 점심시간이면 으레 “‘우리 집’에 밥 먹으러 가자”고 하면서 단골로 드나들었다.

외진 곳의 보기 드문 밥집이다. 음식도 짭짤하다. 관청 공무원들도, 군수도 모두 ‘우리 집’으로 몰려들었다. 강화대교는 1969년 건설되었다. 나중의 이야기다. 강화도는 여전히 섬이었다. 공무원들, 강화읍내 시장 통 사람들은 밥 먹을 곳이 필요했다. 이내 ‘우리집’은 나름 주목받는 음식점이 되었을 터이다.

정식으로 영업신고를 하면서 ‘우리 집’은 ‘우리옥’이 되었다. ‘옥’은 일본식 표현으로 ‘屋’이다. ‘집’이라는 뜻이다. 한글과 한자가 섞인, 생경스러운 이름 ‘우리옥’이 생긴 배경이다.

자연스럽게 ‘밥집’을 물려받다

“고모님은 잔정도 많고 손도 커서 시장 통의 가난한 상인들 밥도 많이 해주셨다. 푸성귀 가지고 나와서 장사하는 이들이 돈이 없으니 곧잘 굶었지. 이들한테 비지도 끓여다 주고 밥도 주곤 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 고모 방숙자씨가 ‘우리옥’을 운영했다. 30년의 긴 세월이었다.

주인 방영순씨는 1967년 결혼, 1979년까지 강화읍내의 자그마한 회사 경리로 일을 하고 있었다. 고모 방숙자씨가 연세가 들었다. “고모님에게 가게를 물려받았냐?”고 물어보면 “물려받은 건 아니고 옆에서 일을 하다 자연스럽게 ‘우리옥’을 운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기야 물려받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우리옥’을 운영하는 일은 ‘권리’라기보다 ‘의무’였다. 가족의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는 ‘밥집’ 운영을 누가 하느냐, 는 문제였다.

게다가 고모님에게는 슬하의 자식도 없었다. 나이가 들면서 일을 하기 힘들어졌다. 조카 방영순 씨 입장에서는 ‘고모님의 일’을 도울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일을 배우고 ‘임무교대’가 진행되었다. 고모님은 원래 음식 솜씨가 뛰어난 분이었다. 동네에서 크고 작은 일들이 있으면 고모님에게 ‘음식 만지는 일’을 물어보러 오곤 했다. 그런 고모님 곁에서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집안에서도 고모님은 조카 방영순 씨의 공부를 가르치는 과외선생으로, 조카 방영순 씨는 음식 만드는 일을 거드는 부엌의 ‘조수’로 지냈던 터였다.

가마솥으로 밥을 짓다

1980년대 초반, 방영순씨는 독립적으로 ‘우리옥’을 운영한다. 자연스런 임무교대였다. 음식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고모님 곁에서 긴 시간 음식 만지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게다가 대단한 요리를 내놓는 것도 아니다. 백반(白飯)이다.

백반은 흰쌀밥을 파는 것이 아니다. 백반은 ‘반찬이 없는 밥상’이다. 반찬은 우리가 ‘요리’라고 부르는 음식들이다. 지금도 ‘우리옥’에서 내놓는 김치, 젓갈류, 나물무침 등은 정식 반찬, 요리가 아니다. 결국 ‘우리옥’의 밥상은 백반이다.

백반의 중심은 당연히 밥이다. 지금의 건물을 짓기 전, 같은 장소에 허름한 한옥이 있었다. 여름철 홍수라도 나면 부엌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고이곤 했다. 멀리서 오는 손님을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물을 퍼내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밥을 했다. 나무가 젖어서 불을 지피기 힘들면 박스를 찢어서 불을 때고 가마솥 밥을 해냈다. 손님들 중에는 1980년대 ‘우리옥의 가마솥 밥’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백반 밥상의 ‘반찬 아닌 반찬’보다 ‘밥’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이 무렵에는 신문이나 잡지 등에 ‘우리옥의 가마솥 밥’이 종종 오르내리곤 했다.

그로부터의 세월이 또 40년 가까워지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젠 고모님이 ‘우리옥’을 운영한 기간보다 방영순씨가 운영한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

“계절 별로 채소가 달라지는 정도이지 밥상 내용이 달라질 것은 없다. 겨울철 김장김치를 기억하는 손님들이 많고, 비지찌개, 순무김치, 조개젓갈, 콩나물국이나 미역국, 두부조림 등, 손님마다 기억하는 음식이 다르다. 고모님이 부엌에서 일하던 시절이나 1980년대 내가 맡아서 했던 시절 그리고 지금까지 별로 변하지 않았다. 늘 그 정도 맛의 비슷한 음식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에 밥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의 ‘우리 집 밥’이나 ‘우리옥’의 밥은 같다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음식 만드는 정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작은 종지에 나오는 꽁치조림 한 조각도 마찬가지다. 무와 생물 꽁치를 넣고 한 시간 이상 졸인다. 생물꽁치조림에서 조미된 깡통꽁치조림의 맛을 느낀다는 이들도 많다.

작은 접시의 조개젓갈도 마찬가지다. 짜지 않고 조미료의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적당히 삭은 조개젓갈의 비린내도 참 반갑다. 채소도 마찬가지다. 강화도 사람들은 순무를 잘 만진다. 고모 방숙자씨도 그랬고 방영순 씨도 마찬가지다. 집에서 해먹는 순무김치의 맛 그대로다.

여전히 방영순씨의 남편은 인근의 텃밭에서 일을 한다. 가게에서 사용하는 식재료 중 상당수는 직접 재배한 것들이다. 생선이나 젓갈류를 제외하고 채소류와 마늘, 고추까지 모두 인근의 밭에서 직접 재배한 것이다.

이 밥상의 가격이 5000원이다. 고모가 운영할 때도 푸근한 밥상, 낮은 가격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격은 여전히 5000원이고 농산물 대부분은 직접 재배한 것이다.

오히려 강화도 현지 손님들은 많지 않은 편이다. 음식점이 귀한 시절에는 귀한 음식이었지만 이제는 맛과 향이 강한 음식들이 지천을 이룬다.

“서울이나 외지에서 오는 손님들이 많다. 특히 서울 손님들이 강화도에 오면 ‘우리옥’의 백반을 먹고 다음에 오면 꼭 다시 들른다.”

인터뷰를 마치며

필자는 이 집의 30년 이상 된 ‘단골’이다. 1년에 두어 번이지만 강화도에 가면 꼭 이집에서 밥을 먹는다. 얼굴도 아는 처지에 ‘사진 한 장만 찍자’고 여러 번 졸랐다. 이야기는 하면서, 끝내 얼굴사진 촬영은 피했다. “나이든 여자 사진 찍는 것 아니다”라고 한사코 피했다. 결국 사진촬영은 실패했다. 대신 그동안 ‘우리옥’에서 먹었던 밥상들을 보여준다.

일본인 요나구니 스스무씨와 이 집에서 TV방송촬영을 했던 적이 있다. 요나구니씨의 코멘트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 집 반찬 하나하나가 모두 코스요리의 요리들이에요. 한국에서 본 최고의 밥상 중 하나입니다”

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캡션

-우리옥

-한옥이었던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섰다.

- 우리옥의 백반밥상. 2016년 현재 5000원이다.

- 우리옥의 비지찌개를 못잊는 사람들이 많다.

- 우리옥의 짭쪼름한 조개젓갈.

백반집 맛집들

욕쟁이할머니집

음식은 장맛이다. 맛있는 장으로 음식을 내놓는다. ‘시래기정식’이 주 메뉴다. 불고기 등을 추가해도 좋다. 물론 ‘시래기정식’만으로도 충분히 맛있는 식사를 즐길 수 있다.

황새올

경기도 안성의 산나물, 들나물이 풍성한 백반 밥상이다. 버섯 등이 들어간 전골 형식의 음식도 좋고 기본 찬으로 나오는 각종 나물들이 풍성하다. 묵나물도 좋다.

착한밥상

더도 덜도 아닌 전형적인 백반 밥상이다. 밥과 국 그리고 5가지 정도의 반찬 아닌 반찬이 나온다. 꽁치, 고등어, 가자미 등 생선을 조리거나 구워서 내놓는다.

걸구쟁이

‘착한식당’으로 선정된 사찰음식전문점이다. 김부각, 산초장아찌 등은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음식들이다. 적절한 양념의 산나물, 들나물 들이 수준급이다. 묵도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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