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의 ‘안동 음식’… ‘음식은 정성’기본 충실, 깊은 맛

시어머니, 남편 이어 식당 운영…거래선 오래 유지, 좋은 식재료 사용

경북 ‘접빈객’ 음식 특성… 장터국밥, 석쇠불고기, 사발문어, 메밀묵 유명

종로 용일여관, 김두한ㆍ이오덕 묵은 일화도… 종업원 가족처럼 지내

거래선 유지해 좋은 식재료 확보… “변하지 않고 푸근한 맛” 평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신랑감’이 어떤 남자인지 알지 못했다. ‘신부’는 늦은 나이였다. 마흔을 넘긴 여자가 소개로 만날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제대로 한 번 물어보지 않고 만났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처음 만나는 남자를 두고 ‘신랑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인의 소개로 만났고 자연스럽게 결혼에 이르렀다. 남자는 재혼이었고 여자는 초혼이었다.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원고 윤문, 편집 일을 했던 평범한 여자였다. 설마 식당 일을 하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

1996년 결혼했다. 남자가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도 한참 후에야 알았다. 남편 김정차씨는 1988년부터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주방 일은 남편 친구의 누님이 도와주고 있었다. 국수집도 해보고, 국밥집도 하고 있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결혼하고 오래지 않아 식당 일은 아내 황현주씨 몫이 됐다.

몰랐던 사실은 많았다. 남편이 자리잡고 식당을 운영하던 공간은 유명한 ‘종로 용일여관’이었다. 이제는 모두 잊은 이야기지만 이 공간은 한국 바둑계에서는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곳이다. 바둑시합을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바둑 기사들은 이 공간에 고단한 몸을 뉘였다. 한국기원이 가깝고 그나마 복잡한 종로통에서 한적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객실도 30개에 이르는 제법 널찍한 공간이었다. ‘ㄷ자’ 형태로 된 마당 한 중간에 화단이 있었다. 마당을 중심으로 30여개의 크고 작은 방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더러는 기사들끼리 화투판이 벌어지기도 하고 술잔을 주고받기도 했던 곳이다. 종로통의 뒷골목 피맛골의 한 자투리였다.

김두한이 묵었던 곳으로도 유명하고 오래 전에는 서울에 오는 이들이 반드시 기억하고 찾는 여관이자 여인숙이었다. 인터넷에는 ‘동화작가 이오덕 선생이 묵었던 곳’이라는 내용도 있다.

남편은 이 공간에서 ‘어머니가 고향 안동의 장터에서 내놓던 음식’을 재현하고 있었다. ‘안동 음식’이 무엇인지도 물론 몰랐다. 고향이 포항이니 어린 시절부터 해산물은 쉽게 접했다. 장터국밥 정도야 먹어봤지만 문어초회와 석쇠불고기를 내는 모습은 생경스러웠다. ‘안동음식’은 결혼하고 나서야 알았다. 시어머님의 장터국밥은 맛이 있었다.

결혼하고 나서 3년 쯤 지났을 때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다. 그 이전에는 시어머님을 ‘방패’삼아 음식에 대한 이런 저런 평을 피할 수도 있었다. 초기에는 남편이 식당 운영을 맡아 하고 있었다. 시어머님이 돌아가신 이상 모든 평가는 집안의 여주인인 황현주씨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남편이 음식 맛을 정확하게 구별합니다. 여자인 저는 어디 가서 음식을 먹으면 ‘이게 맛있다’ ‘이게 맛없다’는 정도로 평가하는데 남편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파맛이다’ ‘이건 무의 단맛이다’라고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저는 고향이 포항이고 남편은 고향이 안동인데 아마 어린 시절부터 먹어본 음식이 달랐으니까 그렇겠지요. 선천적으로 예민하기도 하고요.”

지금이야 ‘종로 YMCA 옆 골목 안의 시골집’ 여주인 노릇을 다부지게 하는 중이지만 처음에는 생경스러웠다. 선지도 그리 자주 접하지 않았던 사람이 장터국밥을 끓여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더하여 시어머님이 전수하고 남편이 물려받은 음식은 경북 북부 그중에서도 안동의 토박이 음식이었다.

흔히 ‘음식 맛이 없는 곳’이라고 저평가하지만, 실제 안동 등 경북 북부 지방의 음식은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의 절제된 음식이다. 한양을 중심으로 이른바 ‘하삼도(下三道)’를 바라보면 왼쪽이 좌도(左道), 오른쪽이 우도(右道)다. 경상도의 경우 경북, 경남이 갈린 것은 불과 100여 년 전이다. 갑오개혁을 통하여 경상도는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그 이전에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좌도와 우도로 갈랐다.

안동과 그 인근은 ‘퇴계 이황의 나라’다. 경상좌도의 중심이다. 퇴계의 제자들이 유학자가 되고 관료가 됐다. 사대부다. 사대부 집안 음식의 정점은 제사음식, ‘봉제사의 음식’이다. 오늘날에도 숱한 안동의 문중 제사에는 문어, 상어, 가오리 등을 사용한다.

태백산맥 너머의 고등어를 등짐을 지고 날라서 사용하는 것은 경북 북부의 음식이 바로 ‘접빈객’의 음식이기 때문이다. 안동의 국시 제사, 제물국시와 건진국시 등도 마찬가지. 국수가 ‘봉제사접빈객’의 주요한 도구이기 때문에 사용했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지금도 안동의 집안 행사에 국시가 빠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음식공부를 하는 이들은 ‘수운잡방(경북 예안)’ ‘음식디미방(안동, 영양)’ ‘시의전서(상주에서 발견)’ 등 조선시대 음식관련 서적들이 상당수 경북 북부지방에서 기술되거나 발견되었음을 주목한다. 역시 음식이 ‘봉제사접빈객’의 주요도구이기 때문이다.

황현주씨의 경우, 결혼 초기 식당 일을 시작하면서 ‘안동 음식’에 대해서 정확히는 몰랐다. 시어머님과 남편은 ‘어릴 적부터 고향에서 접했던 음식’이었지만 아내이자 며느리인 그녀로서는 생소하고 특이한 음식이었을 터이다.

식당 운영에 대해서는 남편에게 배운 바가 많았다. 지금은 일흔을 넘긴 남편이 식당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운영을 맡았던 사람으로 ‘지키는 일’은 있다.

“남편이 식당 일을 할 때는 굉장히 꼼꼼했어요. 지금도 아침 식사는 늘 식당 종업원들과 함께 합니다. 예전에는 매일 아침식사를 같이 하면서 찬바람이 쌩쌩 부는 말을 했지요. 손님들 접객 요령이나 음식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챙겼지요. 아침식사는 아침 조회였던 셈인데 이제는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예전에는 무서웠는데 나이가 들면서 부드러워졌다고들 하지요. 덕분에 옆에서 같이 일을 했던 저도 식당 일을 시작하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개근을 했습니다. 직원들이 대부분 오래 근무하는 것과 제가 20년 개근한 것은 자랑합니다.”

지금도 음식에 대해서는 세세히, 깊이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 개입하고 간을 보고, 만들어 내는 품새도 챙기지만 정작 몇몇 주요한 부분은 주방에 맡긴다.

“장터국밥의 경우, 지금도 완성된 국솥의 간을 보는 정도지, 국밥은 주방에서 만들어냅니다. 주인이지만 국솥은 주방에 완전히 맡겨두었습니다. 그 대신 음식 만지는 분들이 대부분 우리 식당에서 10년, 20년 일을 한 분들입니다. 이분들 믿고 맡기는 것이지요.”

대신, 달다, 짜다, 맛이 싱겁다, 무겁다는 등등 숱한 손님들의 평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설명을 한다. 주방의 솜씨를 믿고 있으니 ‘시골집의 음식은 이렇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손님들 중에는 계절 별로 달라지는 식재료의 상태까지 짐작하고 제대로 설명해내는 분들도 많다. 일행 중 누군가가 음식이 지나치게 달다고 지적하면 “그건 파의 흰 부분 때문인데 다음 달에 서리 맞은 무가 나오면 맛이 더 달다 할 것”이라고 설명하는 식이다. 상당수의 손님들은 단골이고 그중에는 나이든 부모가 아들 내외와 오는 경우도 잦다. 지역 음식을 내놓는 노포의 특징이다.

“예전 건물이라서 동선이 상당히 깁니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대신 뱅뱅 돌아서 가야 하는 경우도 잦고요. 일하는 분들은 힘듭니다. 무거운 음식 그릇을 들고 긴 거리를 움직여야 하지요. 직업소개소에서 일하는 분들이 ‘시골집에는 처음 가면 누구나 힘들다고 하는데 희한하게 한번 들어가면 나올 줄을 몰라’라고 한답니다. 저에게는 최고의 찬사로 들립니다. 오래된 직원들이 많다는 것이 늘 든든합니다. 음식이 변하지 않는 것도 바로 오래된 직원들 덕분이지요. 서빙하는 분들도 오랫동안 근무했으니 음식 내용을 꿰고 있고요. 운영자로서 가능하면 종업원들이 오래 근무하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합니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듣는 이들이 ‘설마?’ 하지만 고기 공급처 중에는 30년 간 변하지 않고 꾸준히 거래하는 곳도 있다.

“음식은 정성이라는 평범한 말을 음식 장사를 하면서 새록새록 되새기고 있습니다. 고기 거래 선을 오랫동안 유지하니 역시 좋은 식재료를 줍니다. 직원들도 오랫동안 근무하니 음식을 정확하게 알고 내놓습니다. 남편 친구 분이 청송에서 장을 담습니다. 간장은 그곳에서 가져오는 것만 사용합니다. 국밥 맛은, 좋은 식재료를, 좋은 조선간장과 더불어 긴 시간 푹 고아서 내놓으면 좋은 맛이 납니다. 저희 식당에서는 솥에서 오래 곤 국밥을 내놓습니다. 밥상에 불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국솥에서 푹 고아서 한 그릇씩 손님상에 내놓는 식입니다. 오래 전에 술국으로 사용했으니 지금도 술국 형식으로 내놓고요.”

포항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안동 출신의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하고 이제 식당 주인으로 20년의 세월을 보냈다. 물론 남편이 식당 일을 했던 기간과 시어머님이 안동의 5일장에서 일을 했던 기간을 더하면 집안은 아주 오랫동안 식당 일을 한 셈이다.

모르고 덤볐던 일이었다. 재개발 대상 지역인 지금의 ‘시골집’이 용일여관이었던 사실도 미처 알지 못했다. 생선을 자주 만났던 해안가 출신으로 경북 북부 안동의 음식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장터국밥, 석쇠불고기, 사발문어, 육회, 시골메밀묵과 모듬전. ‘시골집’의 메뉴다.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날의 풍치, 맑은 여름날 밤에는 도심 한가운데서 시골의 풍치를 맛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제 이 공간도 언젠가는 재개발될 것이다. 허름하지만 100년의 묵은 멋을 지닌 공간이, 깔끔하지만 멋이라고는 한 뼘도 없는 곳으로 변할 것이다.

어떤 음식인지, 음식점 일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일을 시작했고, 이제 단골들도 “시골집 음식은 변하지 않고 늘 푸근해서 좋다”고 칭찬한다. 그 칭찬이 참 고맙다.

다행히 아들이 식당 일을 돕고 있다. 공간과 운영자는 달라질 것이다.

다만, ‘시골집’의 메뉴에는 늘 국밥, 불고기, 문어, 메밀묵이 남아 있을 것이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켑션

-시골집 황현주 대표

-시골집 전경

-시골집 완성된 국솥

-시골집 장터국밥

-시골집 석쇠불고기

장터국밥 맛집

원조할매국밥

1962년 부산 해운대에서 창업한 집이다. 인근이 시외버스 터미널이었다. 가격이 착한 집. 음식은 소박하지만 툽툽하다. 벽면에는 손님들의 낙서가 가득하다. 노포다.

소구레국밥

경북 예천의 시장 통에 있는 작고 소박한 가게. ‘소구레’ 혹은 ‘수구레’는 소의 배 안쪽에 붙은 살을 이야기한다. 정육이 아니라 부산물. 기름기가 좋아서 맛은 뛰어나다.

안성장터국밥

4대 전승, 80년 업력을 가진 집이다. 국밥에 파, 콩나물, 우거지 등 나물이 가득하다. 안성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유명한 집. 경부고속도로와 멀지 않다.

의령 종로식당

붉은 색의 ‘소고기국밥’이 수준급이다. 특이하게 곰탕, 설렁탕을 닮은 맑은 국밥도 가능하다. ‘소고기국밥’은 고기, 콩나물, 대파 등이 주요 재료. 국물의 단맛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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