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같은 부부’, 산속에서 우리 음식맛 기본 ‘장(醬)’만들고 전파

홍천 백이동골에서 진정성 있는 음식 만들어…전국서 주문 쇄도

김제 어린 시절 친구 부부 돼…서울 올라와 음식 장사 시작

식재료 직접 만들어 사용…김밥집, 쌈밥집 등 창업 마다 ‘대박’

쉬엄쉬엄 사는 여유 속 우리 음식 맛 기본인 ‘장(醬)’ 만들고 알려

산에는 흙, 돌, 나무, 풀, 물이 있다. 흙, 돌, 나무, 풀은 움직이지 않는다. 물은 움직인다. 움직이지 않거나 갇혀 있던 물도 언젠가는 움직인다. 몸을 바꾸어 가늘고 작은 물안개가 되어 하늘로 솟아오르기도 한다. 수증기가 되고 몸을 만들어 빗방울이 되기도 한다. 어느 새 다시 땅으로 돌아온다. 비다. 물은 움직인다.

오석조, 윤현림씨 부부. 물과 같다.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백이동길. 고속도로가 끝나고 길이 좁아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산길이 나타난다. 설마, 여기 집이 있을까 싶은 제법 깊은 산속이다. 오두막을 기대했다면 실망한다. 제법 덩실한 기와집이 나타난다. 전통 된장, 간장으로, 메주로, 언젠가부터 ‘착한 단무지’로 널리 알려진 ‘백이동골’의 주인 부부. 장마가 막 시작된 7월 초, 비에 젖은 ‘백이동골’을 찾았다.

“언젠가 어머님이 ‘그저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 살어’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때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요. 그냥 흘렸고요. 나중에 장사가 바쁘고 일이 힘들 때 문득 그 말씀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장사는 굉장히 잘 되었지요. 바빴고 돈도 많이 벌었고. 그런데 어느 날 이게 아닌데, 싶은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어머님 말씀이 생각나고, 결국 짐을 싸들고 백이동골로 들어왔습니다. 결심하고 일주일 만에 백이동골로 들어왔습니다. 이 지역 이름이 ‘화촌면 백이동길’이에요. ‘백이동골짜기’라서 ‘백이동골’이라고 불렀고.”

도시 생활을 등지고 들어온 것은 아직 채 10년이 되지 않았지만 백이동 골짜기와의 인연은 그 이전부터였다. 서울 상계동에서 300석이 넘는 된장박이삼겹살 집을 운영할 때부터 이미 백이동골과의 인연은 시작됐다.

오석조, 윤현림씨 부부는 동향의 어린 시절 친구. 지금도 아내 윤현림씨는 우스갯소리로 “내가 남편 군대도 보내고 이만큼 키웠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생. 두 사람은 대학교 다닐 때 ‘남녀 사이’로 바뀐다. 두 사람 모두 전북 김제에서 전주로 통학을 했고 이 ‘통학’이 결국 두 사람을 친구에서 부부사이로 바뀌었다.

남편 오석조씨는 김제 죽산면 출신. 어린 시절, 동네 전체가 비교적 부유한 곳이었고 집집마다 인근 전주, 서울 등지로 유학을 떠나는 형, 누나들이 많았다. 어머님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몇 번 있었지만 군대 입대 전 ‘막내 며느릿감’을 데리고 나타난 것도 어머님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그럭저럭 또 착하게 고등학교를 마치고/또 그럭저럭 대학에 들어가고/공부에 열중인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여자에도 관심을 멀리해야 하는 것/막둥인 너 하나만은 선을 봐서 결혼해라라는 말에/두 번째 배신을 때린 건 군에 가기 며칠 전/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쬐만 한 것이 소만한 아가씨를 데리고 온 때였다.”

오석조씨는 남자치고는 날씬한 편이고 아내 윤현림씨는 복스러운 편이다. 아마 어머니는 늘 자그마하게 느꼈던 막둥이가 어디서 막내 며느릿감으로 ‘소만한 아가씨’를 데려왔다고 느꼈을 법하다. 블로그에 오석조씨가 쓴 글을 보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쬐끄만 막둥이가 소만한 아가씨를 데리고 왔을 때’ 어머니가 어떤 표정을 지으셨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물론 두 사람은 알콩달콩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어느 새 세월이, 마치 물처럼 흘러, 오석조, 윤현림 부부는 딸과 아들을 얻었다. 그 아들, 딸이 자라서 어느 새 부부의 젊은 시절, 풋풋하게 만났던 그 시절의 나이를 넘기고 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 오석조 씨는 아들, 딸에게 어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전한다.

“아둥바둥 살지 말어.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 살어”

힘들지만 무리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지나온 시간들이다. 힘든 일이 있으면 잠시 쉬었다. 모진 곳을 만나면 돌아오기도 했다. 막히면 잠시 숨을 고르고 길이 열리면 다시 흘렀다.

오석조씨 나이 스물여덟 살에 부부는 서울로 올라왔다. 전 재산 800만원. 남편의 첫 직장(?)은 독서실 운영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이었지만 남편은 힘들어했다. 뭔가 움직이는, 역동적인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첫 번째 외식업체인 김밥 집을 시작했다. 큰 자본을 가진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업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1990년 언저리에 김밥 한 줄에 1800원을 받았다. 비싼 김밥이었는데 손님들은 줄을 섰다. 가게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한 분은 하루 종일 김밥만 말았다. 그 김밥이 다 팔려나갔다. 김밥 집 운영 3년 만에 아파트를 살 정도로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

“대부분 김밥 집들이 식재료를 사서 사용합니다. 저는 우엉이나 단무지를 가게에서 직접 조리했습니다. 우엉도 가게에서 직접 다듬고, 또 직접 졸였지요. 단무지도 늘 신선한 것을 마련하고요. 계란 지단도 다른 집보다는 두텁게 붙였습니다. 좋은 식재료를 정성스럽게 사용하면 손님들이 언젠가는 알아준다고 믿었습니다. 두어해 전에 ‘착한 단무지’를 만드는 집으로 선정되고 나서 아이들한테 ‘착한 단무지 김밥 집’ 창업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예전에 서울 가락동에서 김밥 집 할 때 사용한 단무지보다 지금 제가 만드는 단무지가 훨씬 더 좋아졌잖아요.”

음식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좋은 식재료를 사용하면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 두 번째 강된장, 쌈밥집도 그렇게 시작한 것이었다.

“언젠가 포천 신북의 온천에 간 적이 있습니다. 온천을 하고 나왔는데 문득 된장찌개가 먹고 싶더라고요. ‘온천에서 된장찌개 팔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노원구 ‘서울온천’에 아주 자그마한 가게를 얻어서 강된장에 쌈 싸먹는 쌈밥 집을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인 된장, ‘장(醬)’과의 만남이었다. 1995년 무렵 ‘쌈밥 6천원’ 메뉴로 20평이 채 되지 않는 강된장, 쌈밥 집을 열었다. 장사는 대성공이었다. 손님들은 ‘된장이 맛있는 쌈밥 집’에 줄을 섰다. 일요일에는 테이블 5개짜리 가게 매출이 200만원을 넘기기도 했다.

흐르던 ‘물’이 막히는 일을 이 무렵 겪었다. 가게는 꾸준히 잘 되고 있는데, 온천이 문제를 일으켰다. 경영상의 문제로 폐업하는 상황. 온천이 문을 닫았지만 쌈밥 집은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온천 왔다가 밥 먹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가족나들이로 밥 먹으러 오는 손님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부도 사태로 전기, 수도까지 끊기니 버틸 도리가 없었다. 물이 흐르지 않는 상황. 임대차 세입자들이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었던 시절이다.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관청을 드나들고 원형탈모증까지 겪었다. 권리금은커녕 임대보증금에도 턱없이 부족한 돈을 받고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싸워서 임대보증금을 받을 생각도 해봤지만, ‘쉬엄쉬엄 살어’라던 어머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다시 ‘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도 역시 ‘장, 된장’이 단초였다. 상계동 수락산 언저리에 ‘된장삼겹살’ 집을 열었다. 백이동골에 들어오기 전 운영했던 ‘300석짜리 대형업소’였다. ‘백이동골 된장집’. 당시에는 ‘홍천 백이동골 농장에서 직접 담근 된장으로 음식을 만드는 식당’이라고 표현했다.

“가게를 접고 백이동골로 들어온 것은 어머님 말씀대로 쉬엄쉬엄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된장, 김치 담그고 자연 속에서 예전 손님들과 같이 장 담그는 행사도 하고….”

올해 16회를 맞은 ‘백이동골 된장 축제’에는 예전의 손님들과 새롭게 ‘백이동골’을 찾는 이들이 더불어 모여든다.

“전통방식이 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린 시절 먹었던 그 음식, 식재료, 된장, 간장을 만들려고 합니다. 착한 단무지로 선정된 것도 전혀 기대치 않았습니다. 처음 방송국에서 전화 왔을 때 ‘일 바쁘니 출연하지 않겠다’고 했지요. 지난 가을에 담근 단무지는 올봄을 지나면서 맛이 떨어지고 올해는 별도로 무 농사를 지어서 단무지를 봄에 다시 담갔습니다. 일주일 정도 생무를 햇볕에 말리는 과정이 중요한데 실제 해보면 그게 참 힘듭니다. 건조기에 넣거나 실내에서 말리면 색깔도 예쁘고 일도 편하고 쉽지만 아무래도 깊은 맛이 나질 않습니다.”

메주도 마찬가지. ‘전통메주, 전통된장’을 만든다는 이들도 황토방에서 메주를 띄운다. 불을 때서 실내 온도를 높이고 그 안에 짚을 깔고 메주를 말린다. 메주는 발효되지 않고 그저 마를 뿐이다. 하얀 실 뭉치 같은 것이 메주 사이에 생기고 메주 색깔이 붉고, 노랗고, 깨끗하다. 겉보기에 예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메주를 좋아한다. 바깥에서 말려서 푸르거나 검은 곰팡이가 생기면 못 먹는, 비위생적인 메주라고 여긴다.

“저희 ‘백이동골’의 경우, 메주를 만들면 약 80% 정도는 메주 상태로 팔려 나갑니다. 처음 ‘백이동골’ 메주를 접하는 이들은 ‘깨끗한 메주’를 찾습니다. 검고 푸른곰팡이가 있는 우리 메주를 보고는 꺼림칙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한번만 메주를 사용해보면 이듬해에도 반드시 우리 메주를 찾습니다.”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지만 어린 시절 ‘순둥이’였던 남편 오석조씨는 묵묵히 숱한 농장의 일을 해나간다. 아내 윤현림 씨도 늘 잔잔한 웃음과 더불어 남편을 지켜본다. 산골의 일은 ‘하면 표시가 나지 않고, 하지 않으면 표시가 난다’.

집 바로 곁에 있는 개울의 물처럼 묵묵히 흐른다. 비가 오면 물살이 빨라지고, 비가 개면 개울의 물은 맑게, 서서히 줄어든다. 오석조 씨의 어머님 말씀처럼 ‘쉬엄쉬엄, 무리하지 않고’ 살아갈 터이다.

풍진 가득한 삶을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풍진은 버렸으되, 그보다 귀한 것을 챙기러 산속으로 들어왔다. 우리 음식 맛은 장맛이다. 그 장맛을 찾고, 전하기 위하여 홍천 깊은 산속에 들어온 것이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사진 캡션

-오석조, 윤현림 부부는 어린 시절,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 대학 시절 친구에서 연인으로 바뀌었고 이제 부부로, 친구로 알콩달콩 살고 있다..

-백이동골 간장, 된장 장독들

-단무지는 쌀겨(미강)와 소금으로 절인다. 독 안에 들어 있는 단무지의 모습이다

-백이동골의 밥상이다. 왼쪽 위가 백이동골의 착한 단무지.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이 직접 담근 장독이다. 장독 위에 '소원'을 적었다

장맛 맛집

함씨네밥상

‘콩의 여왕’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함정희 씨가 전주IC 부근에서 운영하고 있는 한식 뷔페식당이다. 점심만 가능하다.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한식 밥상이 푸짐하다.

선동보리밥

성북동의 평범한 보리밥 집이다. 호박잎을 비롯한 나물들이 아주 좋다. 돌솥밥도 좋고 비벼먹는 나물 비빔밥도 수준급이다. 짭조름한 된장도 전통 된장의 짠 맛을 지니고 있다.

다올한식

스스로 음식 만드는 법을 익혔다는 여주인의 음식 맛이 수준급이다. 건강식이지만 굳이 건강식이라고 내세우지 않는다. 청국장을 고기와 접목 시킨 음식도 수준급.

두루담아

곤지암의 ‘마당넓은집’에서 운영하는 한식밥상 전문점이다. 수준급의 된장, 간장 등을 사용한다. 버섯전골의 적절한 버섯 사용도 좋지만 역시 장맛이 수준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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