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지방 음식 건진국시, 묵밥 중심…기본에 충실, 전국서 찾아와

귀한 음식이라고 생각한 적 없다. 그저 예전 만들던 대로, 어릴 적 먹던 그 음식 그대로 만들어 손님상에 내놓는다. 특별할 것도 없고 굳이 내세울 것도 없다. 오래 전부터 먹었던 음식이고 만들던 방식으로 만드는 음식일 뿐이다. 손님들이 ‘맛집’이라고 부르는 것도 아직 어색하다. 인터넷에 떠돈다는 “봉화묵집은 최고의 건진국시집”이라는 이야기도 늘 생경스럽다. 서울 성북구 정릉의 ‘봉화묵집’ 이야기다.

서순필, ‘봉화묵집’의 안주인. 1937년생이니 올해 여든 살이다. 지금 가게 자리 언저리에서 35년 동안 건진국시, 묵밥, 두부 등을 팔았다. 업력 35년. 그동안 이 일대에서 이사를 다섯 번 다녔다.

음식 장사를 하는 이들은 누구나 손님 혹은 남들의 시선을 두려워한다. 맞추려고 한다. 내가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 손님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려 한다. ‘고객만족도’라는 걸 신경 쓴다. ‘맛있고 보기에 예쁜 음식’을 내놓겠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다.

정반대였다. 올해 여든다섯, 여든 살의 노부부는 그런 기준에서 모두 벗어나 있다. 남들보다 잘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남들보다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맛집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좋은 음식이라고, 내놓을 만한 음식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참 희한한 부부였다.

남편 신언근, 아내 서순필 씨 부부. 남편의 고향은 경북 봉화군 물안면이다. 아내의 고향은 경북 영주 부석사 부근이다. 1956년 ‘무렵’ 결혼했다. “언제 결혼하셨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내가 만 19살 때”라는 아내의 말이다. 아내 서순필 씨가 19살이면 1956년이다. 중매는 남편의 매제가 섰다.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결혼이었다.

양쪽 모두 그 무렵 시골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평범하고 가난한 집안. 시골이니 농사를 지었고 가진 재산이 없으니 늘 힘들게 일해도 먹고 살기 힘들었다. 이제는 모두들 잊고 있는 ‘보릿고개’가 있었던 시절이다. 어디나 곡물이 부족하니 굶는 가정도 많았다. 곡식이 떨어지면 남세스럽다고 했다. 가난한 살림살이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남 보기 창피해서 맹물만 가마솥에 넣고 말갛게 끓이는 집도 있었다.

시골이라서 농사를 지으면 먹고 사는 걱정은 없었을 것 아니냐, 고 물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나마 논이라도 제법 가지고 있는 소작농이라도 되면 다행이지만 가진 땅이 없어 남의 땅 부쳐 먹고 사는 농가들은 매일매일 밥 먹고 사는 것이 문제였다.

‘아들이 여덟 살 때’ 서울로 올라왔다. 어차피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살림살이였다. 농사지어서 먹고 살기 힘들면 그나마 사람 많은 대처, 서울이 낫겠다 싶었다. 대단한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작정 상경이었다. 아들 신인식씨는 1959년 생. 그러니 이 가족의 서울 이주는 1967년 무렵이다.

서울 정릉에 자리를 잡았다. 서울토박이들은 ‘아리랑고개’로 알고 있는 곳. 가난한 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오면 자리를 잡는 곳이었다. 재개발되기 전의 ‘아리랑고개’는 꼬불꼬불 좁은 골목으로 유명했다. 눈이라도 오면 차량이 드나들기 힘들었다.

“남편도 일을 하고 나도 일을 했지. 가진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매일매일 힘든 일을 해도 살림이 펴지지도 않고…. 그야말로 입에 풀칠을 하는 정도였지. 굶는 날도 많았고….”

남의 집 파출부로 떠돌던 시절, 이웃사람이 묘한 이야기를 했다. “음식 만지는 걸 보면 솜씨가 있는데, 남의 집 일 하지 말고 음식을 팔아보지 그러느냐?”

번뜩 “그래, 그렇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장사를 시작했다. 굳이 ‘음식점’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요즘 생각하는 그런 음식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번듯한 간판을 내건 것도 아니었다. ‘메뉴판’도 없었다.

가게는 셋집이었다. 남의 집에서 세를 살면서 그 셋집을 가게로 만들었다. 메뉴는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두부, 묵, 묵밥, 만두, 국수 등을 닥치는 대로 해봤다. 손님들이 잘 먹는 것, 다시 주문하는 것을 눈여겨 봤다. 굳이 따지자면 ‘고객만족도’를 셈했던 것이었지만 그보다는 당장 얼마라도 팔려나가는 것이 문제였다.

“왜 건진국시 집을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평범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저 “그중 해보니 국수가 젤 낫더라”. 국수 외에 묵밥, 손만두 등도 내놓고 있다. 아직도 이름은 ‘봉화묵집’이다.

경북 안동 지방에서는 제사 때 건진국시를 사용한다. 밥과 국을 놓듯이 국수를 제사상에 올린다. 손님 접대도 마찬가지. 여전히 건진국시로 혹은 여름철 제물국시로 손님을 맞는다. 목포, 신안 사람들이 “홍어 없는 잔치는 잔치가 아니다”고 말하듯이 경북 안동 일대에서는 “국시 없는 잔치와 제사는 틀린 것”이라고 믿는다.

영주, 봉화는 안동문화권이다. 음식의 기본은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이다. 음식은 제사 모시고 손님맞이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큰 도구다. 그 음식의 으뜸이 바로 국수다.

다른 지역에서는 국수는, 끓는 물에 삶아서 편하게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편한 간식 정도다. 그렇지 않다. 홍두깨로 반죽을 밀고 칼로 촘촘히 썰어서 애호박이나 계란지단을 붙여서 내놓는 국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건진국시의 가락에는 ‘품새’가 있어야 한다. 국수는 아주 얇게 썰어야 한다. 이제는 반죽을 일일이 홍두깨로 밀지는 않지만, 국수는 얇아야 하고 한편으로는 하늘하늘하면서도 힘이 있어야 한다. 씹어보면 건진국시 특유의 식감이 있다. 차지면서도 무르고, 무른 듯 하면서도 쫄깃한 맛이 느껴져야 한다.

고명도 마찬가지. 많이 준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알록달록 예쁘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제철에 구하기 쉬운 것을 사용한다. 잘 차려낸 건진국시는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단아하다. 계란지단의 노란색과 애호박의 녹색이 국수 위에 단아하게 자리한다. 때로는 계란도 노란부분, 흰 부분으로 나눈다. 황백지단을 갖춘다.

부부가 결혼하고 아내 서순필씨가 시집살이를 시작한 1950년대 중반은 막 밀가루가 널리 확산되던 시절이다. 미공법 480조에 의해서 한반도에는 미국 산 밀가루가 흔해지기 시작했다.

안동 지방은 국수가 없으면 행사를 치르지 않았던 지역이다. 그런데 밀가루가 흔해지기 시작할 무렵 결혼하고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가난한 곳에서 먹을 것은 밀가루였을 것이다. 음식은 수제비, 국수 정도. 별 의미 없이 국수를 자주 해먹었다. 지금도 “할 줄 아는 게 국수라서 시작했다”라고 말하는 이유다.

홍두깨로 잘 밀어낸 후 넓게 펼친다. 아래에 신문지를 깔면 신문지의 글자들이 말갛게 비쳐보였다. 콩가루를 적당히 섞은 국수는 하늘하늘 하면서도 힘이 있다.

“콩가루를 잘 섞는 집이 드물다고 하는데 아마 콩 값이 워낙 비싸서 그렇겠지. 우리는 밀가루에 콩가루 30%를 섞는데 해보니 그게 제일 낫더라고.”

개업한 이래 늘 건진국시의 콩가루 비율은 30%였다.

정릉 아리랑고개 인근에서만 5군데를 떠돌았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국수를 팔기 시작했으니 이제 35년을 넘겼다. 지금의 자리에 온 것은 15년 전쯤. 2003년 방송에 출연한 후 방송도 끊었다.

“뭔지도 모르고 방송에 나갔는데 하루 종일 따라다니면서 이것저것 찍어서 고단하고 힘들었어.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쯤은 방송에 나오라고 전화가 오는데 안한다고 해. 내가 너무 힘들어서 안한다고 해.”

번듯한 곳에 가게 자리를 얻어줄 테니 동업하자는 제안도 잦았다. 서울 강남에 큰 음식점을 열어줄 테니 같이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모두 거절했다. “요만큼이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다 싶으니 안한다고 했지. 음식은 손으로 만들고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데 이제 이 나이에 어떻게 그 많은 음식을 만들어? 어려워. 그리고 남이 해준다는 건 뭐든 다 빚인데 내가 어떻게 갚겠다고 지금 빚을 얻어? 요만큼 사는 것도 다행이다, 싶어. 1남2녀 데리고 먹고 살았잖아. 지금 이 집도 아직 빚이 깔려 있어. 집 살 때 진 빚을 얼마는 갚았지만 아직 빚이 있어. 그것부터 갚아야지.”

고마운 손님도 있었다. 1992년 무렵이었다. 나이든 손님이 불쑥 10만원을 주고 갔다. 손으로 만두피를 일일이 밀고 있으니 “이 돈으로 만두피 미는 기계를 사라”고 무턱대고 내민 돈이었다. 그 후 3년 동안 손님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집안에 우환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3년 후에 왔을 때 10만원을 갚고 이자를 이야기했더니 ‘그냥 주려고 했던 돈인데 무슨 이자냐?’고 하더라고. 그 후로 또 안 오셔. 꼭 한번 뵙고 싶은데 오시질 않으니, 돌아가셨나 싶기도 하고.”

서울 강남에서 찾아오는 손님들, 멀리 지방에서 오는 손님들. 언젠가 단체손님이 온다고 하니 동사무소 2층 회의실을 빌려주었던 고마운 분들까지. 건진국시를 6000원 받는 이유도 간단하다. 멀리서 이 먼 구석까지 찾아오는 이들이 고맙고 미안해서 음식 값을 올리지 못한다. 더불어 지금보다 가게를 넓히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멸치, 다시마로 국물 내고, 집에서 담근 조선간장으로 맛을 내는 평범하면서도 단아한 음식. 아직도 고추, 마늘 등 대부분의 식재료를 고향 언저리에서 가져오고, 특별한 맛을 찾지도 않는다. 짜고, 맵고, 단 음식이 유난을 떨지만 그저 그런가 싶을 뿐이다. 만들 줄 알고 손님들이 꾸준히 찾는 음식,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 시골에서부터 만들었던 음식이다.

참 다행인 것은 며느리 한의순씨가 15년 동안 묵묵히 일을 돕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아들이 출근 전 반죽을 밀고, 점심, 저녁 손님맞이 기본 준비를 해두고 나간다. 며느리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든다. 시어머니의 눈으로 보면 아직 많이 멀다 싶지만 늘 마음 한편은 든든하다.

글ㆍ사진=황광해 음식칼럼니스트

-남편 신언근씨와 아내 서순필씨. 노부부는 각각 85세, 80세다.

-봉화묵집 35년 동안 이 부근에서 다섯 번 이사를 했다. 아리랑고개 부근도 재개발이 진행됐다.

-건진국시, 화려하지 않지만 단아하다.

-묵밥도 내놓는다. 가게 이름이 '봉화묵집'인 것은 한때 주력 메뉴가 묵밥이었기 때문이다.

건진국시, 묵밥 맛집

경당고택

음식점은 아니다. 경당 장흥효 선생의 고택이다. <음식디미방>의 저자 장계향 할머니의 친정. 종부는 건진국시 만드는 일에서 손을 놓았지만 며느리가 전수받고 있는 중.

골목안손국수

안동시내에 있다. 안동에서도 안동 건진국시, 제물국시를 제대로 만드는 집으로 손꼽히고 있다. 묵밥 등도 내놓는다.

순흥전통묵밥

영주시내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다. 묵밥과 두부를 주 메뉴로 내놓는다. 직접 만드는 두부, 묵이 수준급.

안동국시

서울 압구정 사거리 부근에 있다. 건진국시, 제물국시 등과 문어초회 등을 내놓는다. 비교적 전통적인 맛을 지니고 있다.



주간한국